뜨거운 확신 - 클래스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
헬렌 S. 정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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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킬미 힐미'라는 드라마가 대세다. 매회 레전드를 기록하는 갓지성과 갓정음의 케미가 단연 돋보이는 드라마랄까. '킬미 힐미'는 어릴 때 학대 기억을 가진 한 다중인격의 남자가 정신과 의사인 여주를 만나 자신의 병을 극복해내는 과정을 풀어가는 성장 로코다.


거기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남에게 착한 말만 하고, 거절할 줄 모르고, 매번 당하기만 하는 주인공이 진정한 자신의 매력을 알고 자존감을 얻게 되면서 치유하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삶에 있어 자존감은 단순히 병을 치유하는데 있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공하고자 할때, 도약하고 할때, 행복하고자 할때 우리는 자존감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곧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 책, <뜨거운 확신>의 저자 헬렌 S. 정은 이 확신이 결코 어떤 특별한 유전자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예언가의 말이나 정해진 숙명이 아니라, 특별함을 이기려는 끈질김과 지속적인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에, 불확실한 현실을 안고, 불확실한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미래를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진정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전신을 깎아내는 수고를 해본 적 없는 이에게는 어떤 신도 확신할 미래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건 가혹한 처사가 아니라 당연한 삶의 법칙이다.


성공의 방향이란 것은 멀리 보는 전지구적인 시야와 그를 위해 웅크리고 인내하는 자세, 그리고 기회를 만났을 때 절대 놓치지 않는 야수와도 같은 본능적인 캐치 감각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 스스로가 지금의 상황을 바꿀 용기가 빛나야 비로소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뜨겁게 확신하고 싶다면, 남의 것을 탐내 빼앗으려고 머리를 굴릴 생각은 비우고 스스로에게 노력을 아끼지 말라. 당신의 그 정당한 성공의식이 당신을 뜨겁게 확신하게 해주리라.

뜨거운 확신, 확신, 헬렌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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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전
곽재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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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에 대한 업적을 기린 역사서에는 그를 위해 제일 앞머리에서 돌격해 목숨을 잃은 병사에 대한 말은 없다.

승리했다, 점령했다, 정복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족할 만한 동사를 들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글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이 살았듯, 글로는 다 적히지 않은 사람들도 영웅과 동시대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들은 태왕 담덕과 함께 승기를 맨 사람들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반대편에 서 패기를 든 사람일 수도 있다.

승리하는 놈이 정의다. 역사서가 온갖 정의로운 역사를 담고 있는 이유다.

이것이 역사서에 적히지 않았을, 그 이가 누구인지 알았어도 적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알게 될 첫 번째 이유다.



여기, 다라국에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기로 소문난 관리 하한기는 어느 날 역적질을 저질렀다는 남녀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직접적인 죄목은 고위 관리인 허공을 살해한 죄이나 그들은 죽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죽였는가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서는 하한기가 빨리 이들을 엄벌하기를 기대하는 자들이 있다.

결국 하한기는 두 남녀를 따로 가두도록 명하고 밤늦게 그들을 찾아가 개인심문을 하기에 이른다.


남자는 자신을 사가노, 여자는 자신을 출랑랑이라고 소개한다.

책에서는 사가노와 출랑랑이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구구절절 풀어놓는다.

어두운 동굴 감옥 안에서, 살랑거리는 촛불 하나에 의지해 호기심에 젖은 긴장된 마음의 하한기가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세파(世波)에 휩쓸린 떠돌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리라.


고구려 왕 담덕에게 아방(아신왕을 모델로 한 듯)이 패하면서 백제 전역은 빈곤의 사회로 돌아가게 된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던 사람들이 노비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사회는 각박해진 상태다.

백성들이 하루하루의 쌀을 걱정하고 있을 때에도 아방은 자신이 담덕에게 겪은 치욕에 몸서리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언젠가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주겠다는 무지한 지배자는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을 파종시킨다.


그것이 사가노와 출랑랑이었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부유한 놈이 어디서 두드려 맞고 오면 잘 먹고 푹 쉬면 낫는다. 그러나 가난한 놈이 어디서 두드려 맞고 오면 회생이 불가능하다.

아방의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 그가 느낀 치욕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전쟁을 치루지 않기 위해 도망가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끝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적에게 잡혔다는 이유로 죽을 뻔한 병사도,

그저 삶을 잇고자하는 세상 사람이다. 자기가 살겠다는 욕구만큼 인간에게 절실한 것은 없다. 살고자하는 욕망에 충실한 것은 비난할 수 없다.

  

이 책의 결말에 닿을 때쯤이면 우리는 사가노와 출랑랑이 역적질로 죽고자 하는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된다.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 속에서 나올 법한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 이게 사람이었지. 이 때도 군상이 존재했구나 라는 걸

새삼 깨닫고 한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겠노라 애썼다는 작가의 의도가 돋보였던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솔직히 역사 지식을 알게 하는데는 큰 도움이 될만한 소설은 아니다. 그저 시각을 비튼 시야의 소설로 훌륭하다 칭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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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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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고 정직한 삶에 대한 동경


여기 아주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다 갔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우연찮은 기회에 어렵사리 농과대학에 들어갔다가 중도에 진로를 바꿔 교수가 되었고, 그러다 종양이 발견되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름이 스토너다.

이 굵직한 책을 모조리 읽어도 스토너란 인물이 엄청난 영감을 얻어 대학을 가겠다는 의지를 설파했다거나,

대학 교수로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커서 부모를 삼일 밤낮으로 설득했다거나, 잘 나가는 교수가 되어 세계적으로 업적을 쌓는 데 온 생애를 쏟아부었다는 얘기는 한 구절도 없다.  




그는 보통 사람의 커리큘럼을 빼다 박아놓은 것같은 정적인 인생을 산 남자다. 역사책에 이 남자의 이야기가 없다는 건 아주 지극히 당연한 사실일 수밖에 없다. 한 것이 없는 인생에 무슨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단 말인가.


극적이지 않은 '인물'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다.

나를 가르친 선생님께서 내게 해주셨던 말이다. 나는 이 <스토너>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내 선생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소설이라면 마땅히 독자를 끌어당겨야 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주목받지 않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흥분시킬 인물을 그려내야 마땅하다. 생각해봐라, <조선 제 4대 왕 세종>, <백성을 조선의 주인으로 만든 리더, 대왕세종> 이 두 문장 중 당신이 어디에 열광할지.

특히나 열정 페이로 인생을 소비하고 있는 풋풋한 20대의 대학생이라면, 화려하고 멋진 성공기를 탐내하는 젊은 피라면 따분한 '스토너'에게 매혹될 이유가 없다.

 

 

 

 

(소설 '스토너' 표지/RHK 출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토너의 삶을 동경한다.

스토너의 삶이 단순했듯, 나의 삶도 그 못지 않게 단순하기 이를 데가 없는 까닭이다.

10대 시절의 나는 내가 무척 잘난 사람이고, 미래엔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멋진 커리어를 가진 인간이 될 줄 알았다.(지금은 지난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 밤 중에 몇번이고 허공에 발차기를 시도 중이다.)

20대의 나는 10대 때 꿈꿔온대로 거친 세상에 나아가 상상했던 대로 벌써 수백번도 도전하고 부딪치고 깨져 있어야 할 거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10대 때의 나와 그닥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보내고 있다.(아무래도 30대 때도 허공 발차기는 여전히 진행 중일 것이다.)



나는 왜 쓸데없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했는가.

그러지 않아도 좋았다. 스토너처럼 어쩌다 얻은 교수 자리에 안주해 학생들을 잘 가르칠 생각만 하면 족해도 되었다. 재수없이 빽 좋은 찰스 워커 같은 문제아 학생을 세미나에 받아줬을 때 수업을 제대로 안 해도 F학점을 주지 말고 그냥 농사 짓는다는 마음으로 C학점을 뿌려 줬어도 좋았을 것이다. 물론 F학점을 주는 바람에 대학의 갑 오브 악마 였던 로맥스한테 20년 내내 승진을 좌절당하는 팔자였어도 잘리지 않았으니 되었다고 위로할 수 있다.


오히려 로맥스의 비열한 뒷공작에 친구인 스토너를 설득하는 고든 핀치같은 인간이야말로 위선적인 영웅이 아닐까? 세계 2차 대전이 터졌을 때 그는 참전하지 않는 스토너에게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욕했었다. 그리고 그는 전쟁이 종결된 후 새로 학장이 될 로맥스의 눈치를 보기 위해 스토너에게 문제아 학생에게 좋은 점수를 주라고 설득했다.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다고. 그의 삶이 드라마틱할 지는 몰라도 우리가 존경하는 인생은 아니지 않나. 물론 실제 인생이었다면 비공식적인 일이었으니 우리는 고든 핀치같은 명예 학장만 기억하는 학생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래도 스토너는 갈굼 당하든 말든 교수직 관둘 때까지 잘 해먹었다. 한 번이지만 자기 이름으로 책도 냈다.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은 적당히 하고 살았다. 이게 왜 실패작인 인생인가.



우리의 삶에서 녹아내는 모든 행복과 슬픔, 쾌락과 좌절, 영광의 기억은 나 자신의 것이다. 남에게는 따분하고 단조로운 나의 생생한 삶의 감각이다!

덤덤하지만 이게 우리의 인생이고, 삶이다. 한 가지 소설스러운 점이 있다면, '스토너'라는 사람이 죽었다고 진짜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프지 않다는 정도다. 끝났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누구든 결국 이렇게 혼자가 되는 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스토너'의 저자, 존 윌리엄스( 1922 ~ 1994))
 


소설 쓸 때 조심하자, 자기 신상 정보를 제 손으로 털겠다.

작중 주인공 이름은 윌리엄 스토너, 이 저자 이름은 존 윌리엄스. 탁 느낌이 왔달까. 소설에 주인공이 미주리 대학에서 학위받는 게 나오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저자 미주리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았다.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을 쓴 거였나 살짝 코난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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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를 가장 뜨겁게 해준 책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생`이다. 정글이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고마운 책이랄까. 서로의 이득을 위해 싸우고 또 누군가의 이득을 위해 희생하는 우리들이 고스란히 녹아 책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나는 원래 그림체가 우아한 만화에 자주 꽂혔는데 `미생`만큼은 그 야생적인 작화가 마음에 들었다. 현실감있는 오 과장의 충혈된 눈이라니. 미생 2가 조만간 나온다던데 기대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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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 승자들의 이기는 방법과 처세의 비밀
이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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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배우 최민식 씨가 나오는 <명량>이 극장가에 흥행바람을 불러오고 있다.  <명량>의 흥행요소는 여러 가지로 추측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열악한 상황 속에서 강한 정신력으로 적군을 물리친 '이순신'이라는 영웅 코드가 골수까지 우려먹어도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역사 속 승자는 모두 이순신 장군처럼 강하고 고결한 정신으로 갖추어진 사람들이냐 묻는다면,

나는 강하게 No!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승자는 승부에서 이긴 사람, 즉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도는 법. 세상에는 영워한 승자가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는 건 죽음이 관문까지 가야 판정날 일이라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는 노력으로 계속 승자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 가.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반드시 학생에게 한 번쯤 이런 요상한 질문을 시도할거다.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 이라는 이상한 문장이 나온다.

 

인간은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과거의 사람이든 현대의 사람이든 우리는 같은 사람이고 그들이 실패했던 것을 수십 년, 아니 수 백년이 지난 오늘에서도 또 실패하고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우리가 과거를 배우는 데 주력하는 것은 그 실수를 조금이라도 덜고 더 나아가기 위해서일거다.

 

승자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에 승자가 어떻게 끝까지 승기를 붙잡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이 때 승자들이 가장 중요시 여겼던 것을 [윈]에서는 '게임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게임의 법칙이란 자신에게 올 절호의 기회를 위해 때를 기다리는 책략이다. 고통과 혼돈의 시기에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처세술은 바로 와신상담이다. 날카로운 칼날을 깊숙이 숨기고 초라함과 비참함 속에서 천천히 힘을 기르는 책략말이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이 와신상담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곤 한다. 자신의 신념과 어긋난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위에 있던 사람은 아래로 돌아갈 수 없다. 뭐 그런 핑계를 대었던 것 같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는 영원히 패자에 남아있을 것이고 영원히 성공할 수 없다.

 

역사 속 승자는 남의 가랑이에 기어가는 일을 하면서 속에 칼을 품더라도 항상 표면적으로는 웃는 낯이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진짜 치욕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치욕을 내일 갚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대학에 갓 들어온 신입내기일 때, 졸업을 앞둔 타 학과 선배님이 했던 말이 윈을 보면서 계속 내 귀에 울리고 있었다. 그 당시 선배는 졸업 앞두고 남의 아래에 들어갈까, 사업을 차릴까 고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그 때 뭣모르고 사업은 실패할 가능성이 많으니 남의 아래에서 돈을 받는 편이 속편할 것이라고 쓸데없는 충고를 했었었다. 그러자 선배가 내게 했던 일침은 날카로웠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면 되지! 그게 두려워 할 일을 못 하고 사니?"

 

 

4살이나 어린 나도 실패를 두려워하는데, 선배는 전혀 두려움 없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었다. 현재 그 선배는 자기가 가야할 길을 위해 착실히 수행 중이다. 그 사람의 삶이 무척 부럽고 멋있었는데 바로 그 선배가 게임의 법칙에서 가장 필요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성공이란 것이 반드시 실패를 많이 겪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져가며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정말 게임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윈]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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