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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전
곽재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평점 :
광개토대왕에 대한 업적을 기린 역사서에는 그를 위해 제일 앞머리에서 돌격해 목숨을 잃은 병사에 대한 말은 없다.
승리했다, 점령했다, 정복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족할 만한 동사를 들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글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이 살았듯, 글로는 다 적히지 않은 사람들도 영웅과 동시대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들은 태왕 담덕과 함께 승기를 맨 사람들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반대편에 서 패기를 든 사람일 수도 있다.
승리하는 놈이 정의다. 역사서가 온갖 정의로운 역사를 담고 있는 이유다.
이것이 역사서에 적히지 않았을, 그 이가 누구인지 알았어도 적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알게 될 첫 번째 이유다.
여기, 다라국에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기로 소문난 관리 하한기는 어느 날 역적질을 저질렀다는 남녀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직접적인 죄목은 고위 관리인 허공을 살해한 죄이나 그들은 죽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죽였는가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서는 하한기가 빨리 이들을 엄벌하기를 기대하는 자들이 있다.
결국 하한기는 두 남녀를 따로 가두도록 명하고 밤늦게 그들을 찾아가 개인심문을 하기에 이른다.
남자는 자신을 사가노, 여자는 자신을 출랑랑이라고 소개한다.
책에서는 사가노와 출랑랑이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구구절절 풀어놓는다.
어두운 동굴 감옥 안에서, 살랑거리는 촛불 하나에 의지해 호기심에 젖은 긴장된 마음의 하한기가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세파(世波)에 휩쓸린 떠돌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리라.
고구려 왕 담덕에게 아방(아신왕을 모델로 한 듯)이 패하면서 백제 전역은 빈곤의 사회로 돌아가게 된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던 사람들이 노비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사회는 각박해진 상태다.
백성들이 하루하루의 쌀을 걱정하고 있을 때에도 아방은 자신이 담덕에게 겪은 치욕에 몸서리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언젠가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주겠다는 무지한 지배자는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을 파종시킨다.
그것이 사가노와 출랑랑이었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부유한 놈이 어디서 두드려 맞고 오면 잘 먹고 푹 쉬면 낫는다. 그러나 가난한 놈이 어디서 두드려 맞고 오면 회생이 불가능하다.
아방의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 그가 느낀 치욕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전쟁을 치루지 않기 위해 도망가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끝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적에게 잡혔다는 이유로 죽을 뻔한 병사도,
그저 삶을 잇고자하는 세상 사람이다. 자기가 살겠다는 욕구만큼 인간에게 절실한 것은 없다. 살고자하는 욕망에 충실한 것은 비난할 수 없다.
이 책의 결말에 닿을 때쯤이면 우리는 사가노와 출랑랑이 역적질로 죽고자 하는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된다.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 속에서 나올 법한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 이게 사람이었지. 이 때도 군상이 존재했구나 라는 걸
새삼 깨닫고 한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겠노라 애썼다는 작가의 의도가 돋보였던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솔직히 역사 지식을 알게 하는데는 큰 도움이 될만한 소설은 아니다. 그저 시각을 비튼 시야의 소설로 훌륭하다 칭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