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계단 스토리콜렉터 93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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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아시나요?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상관없어요. 세라. 중요한 건 당신이 경멸하는 사람들을 나도 경멸한다는 사실입니다."



(중간생략)


제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세라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울 정도의 경외감 비슷한 표정을 읽었다.


"당신 누군지 알아요. 금발이 아니라 검은 머리, 파란 눈이 아니라 검은 눈이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군요."


"난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 때 촉망받던 FBI 소속 요원이었으나 현재는 도리어 FBI 수배명단에 올라가 있는 인물, 제인 호크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는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녀는 남편 닉의 자살을 파헤치던 도중 정계의 무리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은 상태다. 그렇지만 진실에 다가서려는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녀의 가족들을 건드리게 놔둘 생각이 없으니까.



제인 호크는 사건의 실마리를 알고 있을 법무부의 인물 부스 헨드릭슨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이부형제 사이먼을 파고든다. 정확히는 사이먼의 '전 아내들' 이다. 사이먼은 돈 많은 여자들에게 접근해 결혼해서 가진 걸 전부 빼앗고 심리적으로 망가뜨린 후에 내버리는 파렴치한 인물로, 단순히 재산에만 집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을 망가뜨리고 굴복시키는 일을 스포츠처럼 즐기는 범죄자다. 네번째 아내였던 세라와의 접점 이후 그녀는 사이먼의 정보를 얻기 위해 현 여친이 페트라를 납치한다. 남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로 보이지만, 페트라와의 대화 속에선 여전히 그녀가 얼마나 선의에 찬 사람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제인의 무심함을 가장한 선의가 통했는지, 페트라는 한 가지 단서를 무의식적으로 흘린다.



"가끔 내 이름을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 이름을 불러. 기계 이름을."



기계의 이름은 애너벨. 평범한 여성의 인물로 불리는 사이먼의 컴퓨터 이름이다. 사이먼이 사랑에 관해 인식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부른다는 그 이름, 애너벨. 도대체 사이먼이 사랑하는 '애너벨'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정체는 이후 이어진 제인과 사이먼의 대화에서 이어진다. 고작 컴퓨터 이름 하나에도 사람이 내면에 숨기고 있는 진실 한조각을 드러내게 하는 딘 쿤츠의 대화 심리전은 제인 호크를 더욱더 치밀하고 노련한 추적자로 만들게 한다. 



사이먼과의 일을 시작으로 진실 추적에 성공한 제인 호크가 마주한 것은 나노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인간의 뇌를 임의대로 조종하는 신기술을 확보한 무리, '테크노 아르카디언'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음모설이 많은 데에는 아마 이러한 미친 상상력과 또 이런 미친 상상력을 진짜로 실행하는 정신나간 작자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날씨를 조종해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시드니 셀던의 <어두울 때는 덫을 놓지 않는다>가 2004년에 나온 걸 보면 미국은 조작이란 분야에 미쳐 있는 게 분명한 것 같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를 통제하고 제거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얼마나 무서운 음모인지. <구부러진 계단>을 통해 새삼 금단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이 샘솟게 된다. 필자는 제인 호크를 이번에 처음 접해서 몰랐지만, 사실 '제인 호크 시리즈'로 <구부러진 계단>은 이번이 3번째 연계 작품에 해당된다. 듣기로 지난 2편에서의 악당도 부스 핸드릭슨이라고... 시리즈의 빌런은 지독하게 오래 악행을 저질러서 더 끈질긴 매력이 있다.


데이비드 발다치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데커 시리즈가 필자의 최애 영미문학 시리즈이지만, 딘 쿤츠가 네 번째 작품에서도 <구부러진 계단>만큼의 필력을 보인다면 얼마든지 차애 영미문학 시리즈로 올려 줄 용의가 있을 정도다. 딘 쿤츠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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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운하시곡
하지은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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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운하시곡』에 홀린 건 단편선 첫 번째 소설 작가인 하지은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학 친구의 추천으로 본 '얼음나무 숲'을 시작으로 '모래선혈'에서 입덕한 작가였다. '눈사자와 여름' 이후 신작이 없어서 궁금했던 차에 단편집 리스트에 그녀가 있길래 눈이 번쩍 했다. 아, 물론 그녀만의 독자답게 이미 이 책의 제목으로 뽑힌 작품 『야운하시곡』은 출간 되기 전에 접했었다. 무협따위 돈을 주면서 보라고 해도 안 보는 나에게 새로운 장르를 열게 해줬달까. 장르에 한계없이 늘 좋은 필력을 보여주는 하지은의 믿보 작품으로 등극한 『야운하시곡』, 소개하려니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두근하다. 근데 『눈사자와 여름』은 아니었어 지은씨..차기작은 잘하자..?


(일러스트@서번연)



『야운하시곡』은 냉혹한 무림의 패자, 사혈공의 생애를 그린 이야기이다. 원했던 아이도 아니고, 원하던 여인도 아닌 여인과 함께 낳은 아이는 병으로 일곱살의 짧은 생을 마친다. 아이와 함께 했던 7년, 그리고 아이를 묻고 난 이후 만난 새끼 늑대, 그리고 그가 이 생의 원과 업을 정리하는 현재가 혼잡하게 뒤섞여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거와 현실을 드나들며 전개되는 이야기인만큼,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기에 어쩌면 사혈공이 하는 모든 일들이 그저 안타깝고 허무하게만 느껴진다. ...일리가 없잖아!

작중 사혈공의 아들 '휴'는 선천적 기혈과 관련하여 병을 앓고 있다. 사혈공은 어느 날 휴를 통해 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지사자'란 의원을 알게 된다. 지사자는 그저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병을 고쳐주고 대가를 받지 않고 명의였다. 사혈공은 당장 그를 찾아가지만 지사자는 아이를 고쳐준다는 말 대신 낯선 이의 이름을 말하며 그 이를 아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기억할 리 없는 이름. 사혈공의 검이 보낸 무수한 피 중 하나였을 뿐. 그러나 그 이름은 지사자의 유일한 혈육인 아우의 것이었다. 지사자는 협박과 애원을 동원하며 아이를 살려달라 빈다.

"무고한 아이의 생명을 가지고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저를 죽이시고 제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복수를 하실 것이라면 아이가 아니라 저에게 하십시오."

그는 무릎 꿇은 나를 보고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하고 있지 않은가."

끄어어어어 우리 휴 살려내애애애애애 이게 뭐야야야 의원놈아 니 동생 이름 나도 모르겠고 일단 휴를 살려내라고오오오오... 를 읽는 내내 외쳤다. 사혈공이 젊어서 사람 죽이고 다닌 거 내가 알 게 뭐람. 똘망똘망하게 고마워요 아버지 고마워요를 말하는 일곱살 난 소년 살려서 고마워요 의원님 고마워요 소리 들으며 용서해주면 안되겠니..? 그러나 사랑이 돌아오듯 업보도 돌아오는 것. 지사자는 끝끝내 휴를 고치기를 거부한다. 결국 끔찍한 병마와 싸우던 아이는 사혈공에게 자신을 죽여달라 빈다. 차라리 고통 없이 일찍 끝내고 싶다고. 사혈공은 다시 만나자는 약속 하나를 주고받고 아이를 손수 명계로 보내준다. 아이를 묻고 나서야 그를 용서하고 아이를 치료하러 온 지사자 한국인이 제일 싫어하는 속도다 인마 도, 사혈공도 모두 허무하다. 죄는 사라지지 않고, 생은 계속된다.

『야운하시곡』이 주는 업보와 생의 굴레의 허무함이 너무 오래 가서 사실 뒤의 6작품 먼저 읽고 이 작품을 읽었다. 읽은 지는 꽤 되서 분명 내용 자체는 가물가물한데 은근히 읽기 가슴 아팠다는 감정만 오래도록 남은 듯 하다. 다시 읽어도 찌통인 작품. 그러나 안 읽고는 못 배기는 그런 작품이 『야운하시곡』이다.

『야운하시곡』 단편선은 7개의 작품이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편이다 보니 훌훌 넘어가는 재미가 있다. 엄청 커다란 사건도 없지만 딱히 죽을만큼 목 멕히게 하는 고구마도 없다. 짧지만 소재에 온전히 집중하여 압축된 이야기들이 굉장히 흡입력이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일단 작가들 중에 필력이 내 취향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동양 소재로는 아무래도 정보나 역사 뿐만 아니라 대화체까지도 제한된 부분이 많았을텐데 7작품 모두 퀄이 어마어마했다. 단편 드라마로 나와도 7개 다 본방사수할 느낌이다.

개인적 팬심과 가장 높았던 퀄의 『야운하시곡』을 제외하고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다시 쓰는 장한가』였다. '장한가'는 백거이의 작품으로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명인 양귀비와 현종의 비련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서사시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비련의 사랑 같은 소리 하는 걸 보니 백거이 그렇게 안 봤는데 어지간히 아부쟁이였나보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미쳤다고 좋아하냐. 연하의 다시 없을 미남도 아닌데 양귀비가 미쳤냐고. 권력도 사랑의 이유가 된다면 인정. 그런데 꽤 많은 중국의 작품들도 양귀비의 주체에 대해서 강제였지만 후에 쌍방이 된다는 뉘앙스로 로맨스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대..대단하다 이놈들! 이왕 그렇게 그려낼거면 좀 설득력 있게 그려내면 안 되나? 현종이 매번 강제로 하고 양귀비는 일단 억지로 따르고 그 이후 서사 쌓는 거 지루하지도 않냐. 불륜 드라마까지도 섬세하게 그려내는 K국에선 어림도 없는 전개다. 그런 시류에 꽤 실망스러웠는데 국내에서 양귀비를 소재로 『다시 쓰는 장한가』 같은 양귀비의 마음을 꽤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 나올 줄이야.


(일러스트@서번연)


『다시 쓰는 장한가』는 미색을 지닌 요부로만 평가 받아 온 양귀비와 현종의 이야기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소설이다.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는 사람이 양귀비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이끄는 주체 화자는 양귀비가 아니라 제 3자이다. 타인의 입과 시선을 빌려 양귀비를 새롭게 묘사하면서 그로 인한 보는 인물의 심리의 변화까지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의외로 굉장히 중국스러운 배경을 잘 풀어내더라. 내노라하는 중국 언정 소설 몇 권을 다 봤지만, 이만하게 심리 묘사를 잘하는 작가는 정말 드물다. 김이삭씨 다음 작품이 참 궁금한 걸....? 중국 문화 덕질하다 여기까지 왔으면 더 덕질해서 끝을 보자. 우리 이삭씨 화이팅.

정말로 양귀비가 현종을 사랑할 수도 있겠지. 그런 가능성을 일말의 재고없이 떨구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사랑은 정말 다양하고 여러가지 색깔을 띄고 있기 때문에, 내 관점이 이해못할 사랑이라 할지라도 진실되었다면 그것 역시 사랑이리라. 그런데 수많은 작품들이 양귀비의 가련함과 비참한 인생을 재조명할 때에도 그녀가 정말로 현종을 사랑했는지, 사랑하지 않았는지, 사랑했다면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무슨 마음으로 대했는지 등등 그녀가 품었을 위험하고도 야릇한 사고 혹은 처절하고 괴로운 그녀만의 시각을 제대로 표현하기를 주저해왔다. 왜? 시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라서? 사랑따윈 한 점도 없이 강제로 당한 여자는 생각따위는 없어서인가? 아니면 너무 가서 현종 재조명할게 두렵냐 충분히 인간이 가질 만한 모든 원인을 배제하고 왜 '결과'에만 치중하며 온전히 인물을 그려내지 못하는 걸까. 『다시 쓰는 장한가』는 이런 점에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애정을 하든 증오를 하든 감정에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공감대가 없는 무수한 작품 중에 이런 보석같은 작품을 만나 그저 반갑다. 물론 굉장히 양귀비에만 치우쳐준 시각이다. 백성들이 보면 현종이나 양귀비나 그저 폭탄...백성 관점 나오면 고어물, 복수물, 혁명물 되는 거야 그냥...

브릿G에서 수작의 작품을 출간해서 오랜만에 진짜 재미있게 동양 소설을 읽었다. 유명 소설 플랫폼에 가면 제목부터 머리 싸쥐고 싶은 것들 투성이라서 꽤 오랫동안 새 작품 파기를 주저했는데 브릿G가 다시금 벨테기를 극복하게 해줬다. 근데 문제는 이만한 작품을 찾기가 또 어렵다는 거.. 브릿G의 앞으로 행보를 기대해본다.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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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1~3 + 호빗 세트 - 전4권 톨킨 문학선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김보원 외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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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만연해 있던 세상에서 살았던 때가 있었다.

올림푸스 신화에 미쳐서 애니를 시청하고, 굿즈가 뭔지 모르던 나이에 캐릭터 카드가 갖고 싶어서 몇달 간 용돈을 모아 기어코 문구점으로 달려갔을 정도였다.

그 후에 중국 신화, 한국 신화, 일본 신화 등등 신화 자체가 빠져보려 했지만 생각만큼 끌리지 않았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쏟아내는 이야기에도 결국 한정된 '틀'이 존재했고 그 틀을 아는 순간, 모든 이야기가 식상하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세월이 흘러 신화라는 존재가 민족 우월주의에서 기이한 그들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었을 때, 

거친 황야와 광대한 산맥의 이야기를 담는 작가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를 그 시절, 신화에 열광했던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호빗>은 50주년 완역 전면 개정판 시리즈 중에 4번째 작품이자 시리즈의 외전인 작품이다. 톨킨 작품 중에 국내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반지의 제왕>의 인기에 힘입어 이젠 함께 인지도가 올라간 녀석이기도 하다. 명작의 반열에 올리는데는 좋은 책을 발굴하고 싶은 독자들의 힘이 아닐까. <호빗>은 그런 독자들의 열과 성이 만들어낸 책이다.


작품명에서 드러나듯이 <호빗>은 톨킨 세계관에서 묘사된 '반인족' 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의 특징은 보통 인간들의 허리만큼밖에 되지 않는 신체를 가졌으며 발이 매우 크고 술을 좋아하는 호쾌한 인족으로 소개된다. 신적 요소를 가진 신화형 소설에선 왠만하면 이런 우락부락한 캐릭터들이 '주연'을 차지하기는 쉽지 않다. 신화가 대변하는 우월한 민족성 반영 때문이다. 그럼에도 톨킨은 틀에 박힌 캐릭터의 멋짐을 표현하는 대신 캐릭터 자체만으로도 빛나게 묘사한다. 이 매력적인 땅딸보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호기심이 가득한 세상이다.



「땅속 어느 굴에 한 호빗이 살고 있었다. 굴이라고는 하지만 지렁이가 우글거리거나 지저분하고 더럽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곳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앉을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마른 모래만 깔려 있는 건조한 굴도 아니었다. 그곳은 호빗의 굴이었고, 그 말은 곧 안락한 곳이라는 뜻이다.


.

.

.

아, 참, 그런데 호빗이란 무엇일까? 요즘에는 호빗에 대해 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들을 보기 매우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그들이 큰사람이라고 부르는 우리를 보면 숨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체구가 우리의 절반쯤 되고, 수염이 텁수룩한 난쟁이들보다도 더 작은 종족이다. 호빗들은 턱수염이 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술을 거의, 아니 전혀 부릴 줄 모른다. 여러분이나 나같이 크고 어리석은 족속이 코끼리처럼 쿵쿵대며 어슬렁거리면 1, 2킬로미터 밖에서도 그 소리를 듣고 재빨리 조용히 사라지는 평범한 재주밖에 없다. ……이제 호빗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알았을 테니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자.」



마술도 못해, 수염도 없어, 키는 작아, 가진 재주는 그저 도망이 빠르다는 것 뿐인 '호빗'은 평범 그 이하인 것 같으면서도 모자람이 돋보이는 그런 매력이 넘친다. 사람을 좋아하는 인간 친화적인 태도와 그들이 사는 세상 자체가 '안락'의 상징이라는 말에 상상이 꼬리처럼 달리는 기분이다.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저 모지리 종족이 왜 주연 안에 들어가는 지 전혀 이해를 못했었다. 아라곤, 레골라스, 간달프, 김리 등 다른 캐릭터의 매력이 넘치는 와중에서 더 모자라 보였던 것도 한 몫 했었다. 그러나 톨킨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가 '호빗' 이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가장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보여주었던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나약하고 소심하고 탐욕스러운 일면에는 결말에서 커다란 전쟁이 끝나고도 새로운 자아를 찾으러 떠날만큼 용기 많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호빗>은 <반지의 제왕>에 나왔던 호빗들의 조상인 빌보가 겪는 여정의 이야기로, 자신의 세계를 사랑하는 호빗들 중에 유일하게 모험을 할 용기 있는 사람이자 그 특별함으로 인해 다른 호빗들에게 배척 받는 캐릭터이다. 이 영웅답지 않은 영웅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개개인은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을 투영하고 싶어진다. 호빗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나 자신도 세계를 구할 영웅이 되어 모험을 떠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마법이 톨킨의 작품 <호빗>에 깃들어 있다. 


이 작품은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만큼 번역가나 출판사에 따라 번역 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책을 많이 읽어 본 눈썰미 좋은 독자들은 오역이나 오타까지도 곧잘 캐치하여 편집자를 놀라게 하지 않나. 게다가 시대에 따른 단어 해석의 다양성도 책의 퀄리티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건만 아쉽게도 이번 50주년 기념 완역 개정판은 이러한 독자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실패한 듯 하다. 작가와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인 책이라는 작품을 두고 아쉬운 목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대규모 프로젝트였을 <반지의 제왕> 완역판인 만큼 지도나 가이드북, 하드케이스 등으로 독자를 유혹하려고 노력했으나 역시 책의 본질은 내용에 있다는 걸 알려준 사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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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어하우스 - 드론 택배 제국의 비밀 스토리콜렉터 92
롭 하트 지음, 전행선 옮김 / 북로드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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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 아파트, 취미, 안전……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미래 기업 클라우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국의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이 한 말이 있다. '해답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은 없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이런 말을 보면 우리가 흘러가는 사회와 우리네 삶이야말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해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임이 분명하다. 


세상이 변했다. <웨어하우스>의 세상은 이 완벽한 문구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 지구 온난화, 대량 총기 사건 등으로 외출을 꺼리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들에게 울타리 안의 윤택한 삶을 살도록 도와줄 그룹, '마더클라우드'의 등장은 많은 걸 변화시켰다. '마더클라우드'란 일종의 유통 플랫폼이다. 제품을 최저가로 판매할 뿐만 아니라 주문한 상품을 한 시간 내에 문 앞까지 배송해주는 그야말로 미래 기업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나의 삶을 가족에게 돌려준다는 기업 모토까지. 사람들은 점점 개미떼처럼 마더클라우드로 모이게 된다.


<웨어하우스>는 '꿈의 기업'이란 이름 아래 모인 '마더클라우드'를 비롯한 세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삶을 정리 중인 마더클라우드의 CEO 깁슨, 마더클라우드로 인해 자신의 사업을 접어야 했던 팩스턴, 거대 비밀조직의 임무로 마더클라우드에 직원으로 잠입한 기업 스파이, 지니아가 바로 이 중심의 주인공들이다. <웨어하우스>는 마더클라우드와 이들의 관계, 지나온 과거와 현재 삶을 기술하며 우리가 꿈꿔왔던 이상의 삶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지나온 인류의 삶과는 또 다른 일상, 또 다른 미래를 맞닥뜨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웨어하우스>같은 기업형 SF소설은 굉장히 오랜만에 읽는 거라 새로운 기분이었다.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계열인데다 어지간하게 확실한 체계가 아니라면 독자를 매혹시키는 설득력이 박해지기 쉬운 계열이니까. 하지만 <웨어하우스>의 기업 체계는 이런 소설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에게도 비교적 쉽게 이해될 것이다. <웨어하우스>가 추구하는 기업 체계야 말로 대한민국의 유통 현실과 가장 맞닿아 있는 시스템이니까. 우리야 원래 유통의 '민족' 아니었던가. 당일배송, 1시간 원칙, 이런 컨셉은 국내에 수많은 유통, 마켓 플랫폼이 자신만의 컨셉이냥 운영 중이고 있다. 우리에겐 미래도 아니고 벌써 현실로 다가온 문제다. 누군가의 행복한 삶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노력과 돈을 무한정 갈아넣어야 하는 그런 미친 기업 구조. 


우리의 삶으로 <웨어하우스>가 다가온 순간, 더 이상 마더클라우드는 꿈의 기업이 되지 않는다. 그 뒷배경에 수두룩하게 산재해 있는 열악한 노동자의 처우야 말로 우리가 외면하는 현실이고, 감당해야 할 미래의 모습이니까. 신기술과 새로운 일상이 우리에게 펼쳐졌을 때, 우리는 그 미래가 주는 환상과 꿈에 젖어 버린다. 쉽게 누리고 쉽게 즐기고. 뒤늦게 찾아오는 두려움에 대해선 잠시 묻어둘만큼. 그것이 당연한 원칙임을 그렇게 망각한다.


모두가 꿈꾸고 모두가 가길 원하는 기업, 마더클라우드에서 느껴지는 불온한 움직임과 무서운 사건들. 그것들이 마냥 책 속의 세상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소설, <웨어하우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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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합본] 보보경심 (전3권/완결)
동화 지음, 전정은 옮김 / 파란썸(파란미디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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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좀 어설픈 문장력..번역 다시 하면 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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