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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1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연말에 발표되는 수상작들 리스트들을 보며 기대했던 소설 중에 하나였다. 발표되는 리스트들마다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었으니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18세기 런던의 분위기와 맞물려 해부학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녹여냈을지 궁금했다. 그 시대, 그 직업에서 오는 음습하고 묘한 분위기의 매력도 느껴보고 싶었고. 물론 작가의 수많은 수상 경력에서 오는 믿음직한 면도 한몫했고.
18세기 런던. 해부학이 터부시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대니얼 버턴은 해부학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사회 분위기 탓에 해부 실습을 위한 시체 구하기가 쉽지 않다. 임신 6개월 여성 시체를 어렵게 구해 해부를 하는 도중 갑작스레 들이닥친 경찰들 때문에 시체를 난로 속에 숨기기로 한다. 경찰의 추궁에 진땀을 빼지만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숨겨두었던 시체를 꺼냈는데 처음 해부하던 임신 6개월의 여성 시체가 아닌 사지가 잘린 소년의 시체였다. 뒤이어 안면이 으깨져 형체를 잃은 정체불명의 남성 시체가 연이어 난로 속에서 나오자 어이를 상실한 대니얼과 그의 제자들.
초반부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보여준다. 해부학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예상과 달리 본격추리물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다. 연구실에서 연이어 발견되는 시체들의 정체를 찾아나가는 즉, 사건을 풀어나가는 주체는 맹인 판사 존 필딩과 그의 조수(?) 앤 셜리 모어이다. 해부학 박사인 대니얼은 그저 많은 등장인물 중에 하나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그가 있어 이 모든 사건이 얽히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하는 역할은 미미한 편이다.
사건을 재구성하며 범인을 추려내는 과정은 본격추리물로서의 매력이 높은 편이다. 그 시대에 어울리는 과학적인 해부 장면은 색다른 볼거리다. 해부학이라는 소재를 이렇게밖에 쓰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취향 차이로 나에게는 아쉬운 책이 되었지만 본격추리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다. 지난한 과정들을 지나 결말에서 오는 짜릿한 통쾌함은 중독처럼 자꾸 찾아보게 만드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