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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화 - 꽃을 사르는 불
이경민 지음 / 노블마인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의 한성대화재 사건은 어디선가 접해본 기억이 있다. 실록에 적힌 단 몇 줄의 기록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걸 소재로 소설을 썼단다. 역사 팩션 소설과 친하지는 못해도 관심은 많으니 얇은 귀는 팔랑팔랑. 패기로 똘똘 뭉친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소리에 얼마 전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내심 걱정도 했는데 풍부한 상상력을 무기로 거침없이 써내려간 글에 빠지게 되었다.
도성 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답교놀이가 시작되었다. 시전에서 일어나는 화재들은 방화범 ‘빠른 발’의 소행임을 알지만 범인을 색출하지 못하고 있다. 답교놀이 때문에 시전으로 모여든 사람들 틈에 껴있던 호림은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고, 수성금화사 별제 의준에 의해 멸화군 두령으로 임명된다. ‘빠른 발’에 의한 방화 사건과 별개로 입이 인두로 지져진 사체들이 발견된다. 전혀 다른 두 사건의 연관성을 알게 된 호림과 의준은 사건의 중심으로 점점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숨겨진 음모는 과연 무엇일까.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호림과 음흉한(?) 아군 의준. 남자 캐릭터들은 꼭 필요한 존재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 캐릭터들이 상당한 매력을 발산한다. 통통 튀는 색장나인 채령과 마성의 기생인 자란까지... 그 외에도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많은데 각개전투로 따로 노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한 부분에 맞게끔 배치해서 산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등장인물이 조금 많아 산만해질까봐 걱정했는데 괜한 기우였다.
조선시대에 소방관청을 대신할 기관이나 사람이 있었을까. 지금이야 전화 한통으로 신고부터 화재 진압까지 가능한 시대지만 그 시대에 그게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책 속에는 화재 진압에 필요한 도구들이 등장하는데 생각보다 과학적이고 번뜩이는 아이디어처럼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자료 조사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 걸로 보인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아니니 그럴듯한 사실처럼 느껴져 재미를 더하기도 하고.
정말 한숨이 푹푹 쉬어질 정도로 무참히 무너져 내렸던 국내 장르소설에 대한 기대가 조금은 회복되었다. ‘멸화’ 덕분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멀리 달아난 애정을 원상 복귀 시켜준 아주 고마운 작품이다. 아직은 좀 더 친해져야할 역사 팩션 장르이지만 이만하면 성공적인 만남이 아니었나 싶다. 흔한 궁중사를 다룬 역사 팩션이 아니라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소방관인 멸화군이라는 소재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단단해진 역사 팩션 소설의 다른 깊이를 두루두루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