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광복 직전에 염병으로 돌아가신줄 알았던 할머니가 67년만에 살아서 돌아왔다. 최씨 문중 양반가의 선비다운 자태로 늘 대나무처럼 꼿꼿하시던 할아버지는 미국물 물씬 풍기며 등장한 할머니를 보자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온갖 악다구니를 입에 담으며 집에서 내쫓으려 한다. 누구 하나 반기지 않는 방문에 할머니는 온 식구를 앉혀 놓고 자신에게 60억의 재산이 있으며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67년만에 식구들을 찾아왔노라고 얘기한다. 그 말 한마디로 할머니의 유산을 얻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의 서막이 오른다. 

 

취업전쟁 88연패라는 대기록을 가지고 있는 나이 서른 다섯의 주인공 동석. 주야청청 새로운 시대를 꿈꾸지만 선거마다 당선 안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아들을 대신해 슈퍼를 꾸려가며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는 엄마. 외모, 학벌, 직업까지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완벽하지만 위태로운 집안의 생계를 모른 척 할 수 없는 동석의 동생 동주. 갖은 고생을 하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고모. 서로 다른 이유로 할머니의 유산을 탐내지만 60억의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진짜 존재하는지 의문 투성인 자신의 유산을 가지고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희망 고문 한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할머니의 유산 60억때문에 벌어지는 가족들간의 경쟁과 서서히 드러나는 할머니의 가슴 아픈 과거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알쏭달쏭한 60억의 정체도 한몫한다. 유쾌한 웃음과 덤덤한 문장으로 무장하고는 중간에 책을 덮지 못하게 한다. 빠르게 읽히며 재미도 있고 몰입하게 만드는 이야기. 어떠한 주제로 얘기하는 책이든 이렇게 잘만 읽히고 잡생각 들지 않게끔 하는 책은 너무 좋다.

 

얼마만큼의 돈인지 가늠도 안되는 60억의 큰 유산 앞에서 누군들 초연해질 수 있을까. 처음에는 67년만에 돌아온 할머니를 반기는 이유가 60억의 유산때문이었지만 긴 세월동안 쌓여 왔던 오해들이 풀리고 할머니의 진심을 깨달았을때는 그냥 나의 할머니니까, 죽기 전에 자식들 얼굴 보고파서 먼 길 돌아온 할머니이기 때문에 모든걸 이해하고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진짜 60억 있냐는 동석이의 물음에 묵묵무답이나 회피로 일삼던 할머니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할머니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60억이라 해도 할머니가 하는 말이기에 믿고 싶다.

 

p.184

그게 그렇더구나. 사람이 아무리 머리로 산다고 해도 한번 가슴이 동하면 머리 같은 건 정말 쌀 한 톨보다도 못한 게 되더라고. 나중에 후회를 해도, 다시 그 순간이 돌아오면 어쩔 수 없이 또 가야 하는 길. 이제 죽을 때가 돼 가니 비로소 알 수 있단다. 그게 사람 사는 길이야. 뜬구름 같은 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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