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뉴욕 3부작>

나는 속으로 삶이란 이치가 닿지가 않는다고 우겼다. 사람은 살다가 죽게 마련이고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은 이치에 닿지가 않는다고. 나는 아메리카를 탐사한 최초의 프랑스 원정대 대원이었던 라 셰르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1562년 장 리보는 상대수의 부하들을 포트 로열에 남겨두었는데, 그들의 자휘를 맡은 알베르 피에라는 공포와 폭력을 통제 수단으로 삼은 미치광이였다. 그때의 일에 관해서 프랜시스 파크먼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자신의 미움을 산 고수(鼓手)를 자기 손으로 직접 목매달았을 뿐 아니라, 라 셰르라는 병사를 요새에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무인도로 추방해 굶어 죽게 내버려두었다.〉 알베르는 결국 부하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했고 반쯤 죽어가던 라 셰르는 무인도에서 구출되었다. 혹자는 라 셰르가 이제 안전할 것이라고, 그토록 끔찍한 처벌을 견디고서 살아났으니 더 이상 참변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것도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삶에는 유리하게 접어줄 조건도 없고 불운에 제한을 둔다는 규칙도 없다. 순간순간마다 좀전과 마찬가지로 비열한 속임수에 당할 각오를 하고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나는 라 셰르를 단지 하나의 예로 들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그의 운명도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운명에 비해 순탄했던 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는 직선 행로를 따라간 셈인데, 그것만 하더라도 보기 드물고 축복에 가까운 일이다. 삶은 대체로 이리저리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며 떠다밀고 부딪히고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한 방향으로 나아가다 중도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옴짝달싹못하거나 이러저리 떠돌거나 다시 출발을 하면서. 알려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원래 가려고 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 이르고 만다.
결국 요점은, 하나하나의 삶은 그 삶 자체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삶이란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가 뭐래도 삶이란 우발적인 사실들의 총계, 즉 우연한 마주침이나 요행, 또는 목적이 없다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연대기에 지나지 않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