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뉴욕 3부작, <잠겨 있는 방> 중에서

 

팬쇼가 결국 어떤 존재가 되었건, 내 느낌으로는 그 존재가 그때부터 비롯되었던 듯싶다. 그는 아주 일찍부터 자아를 형성했고, 우리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쯤에는 이미 명확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들 대부분이 형체도 갖추지 못한 채 한순간 한순간 무턱대고 허둥대며 끊임없는 소란에 휩쓸렸던 반면, 팬쇼는 분명히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아이였다. 하지만 이 말을 그가 빨리 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그는 결코 자기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 적이 없었다―어른이 되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소동에 휘말려들지 않았다. 그의 꿈은 좀더 내면적이고 분명히 좀더 엄격한 다른 질서에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삶을 구분짓는 갑작스러운 변화는 전혀 없었다.

자발적인 선행,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 결과에 대해서 보인 순종적이라고 할 만한 대응. 그의 행동이 아무리 주목할 만하다 할지라도 그는 언제나 그 일에 초연한 것처럼 보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그에게서 종종 겁을 먹고 물러선 것은 바로 그런 특성 때문이었다. 나는 팬쇼와 그토록 가까웠고, 그처럼 열렬히 그를 찬미했고, 또 그와 같아지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했지만, 다음에는 느닷없이 그가 나랑 걸맞지 않으며,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그의 생활방식이 내가 살아야 할 방식과 절대로 맞아떨어질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들곤 했다.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바랐고, 욕구가 너무도 많았고, 순간순간에 너무 얽매여 있어서 그런 무관심의 경지에는 도저히 이를 수가 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잘하는 것, 이를테면 좋은 성적, 대표팀 마크가 붙은 운동복, 평가 기준이 무엇이든 그 한 주 동안 뭘 잘했다고 받는 상 같은 내 야망의 헛된 징표들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팬쇼는 자기만의 구석에 조용히 서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그런 모든 일로부터 뚝 떨어져 있었다. 만일 그가 뭔가를 잘했다면 그것은 언제나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가 한 일과는 아무 관련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리가 열셋인가 열네 살이 되었을 무렵부터, 팬쇼는 일종의 내면적인 유배자가 되어 해야 할 일을 꼬박꼬박 해나가면서도 자기가 살아야 하는 삶을 경멸하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말썽을 피운다거나 표면적으로 반항을 한 거은 아니었고 그저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언제나 이런 저런 일들의 한복판에 서서 그토록 많은 주목을 받은 뒤로, 그는 우리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쯤에는 거의 사라진 사람처럼 스포트라이트를 피한 채 어떻게든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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