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
베로니크 비엔느 지음, 에리카 레너드 사진, 이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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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적 결함, 의도적 실수, 완벽한 결함….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란 말인가.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베로니크 비엔느와 에리카 레너드의 책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가 전해주는 이 말들은 완벽함에 매여있는 이들에겐 그야말로 '복음'(Gospel말고 good news)일 지도 모른다.

"이슬람 예술품 가운데 초호화품 카펫이나 도자기, 모자이크에는 항상 작은 결함들이 존재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오직 신(神)만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작가들은 고의적 결함들을 만들어 넣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18쪽)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장품회사의 상징이 된 코코 샤넬은 (중략) 자연이 우리에게 준 얼굴은 20세의 얼굴이지만 50세의 얼굴은 자기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믿었다. 눈가의 잔주름이나 얼굴주름, 웃음자국 등이 전혀 없으면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샤넬은 '여자에겐 사랑스러운 흠이 있어야 한다'고 일축했다."(36쪽)

내 이야기를 좀 해보자. 잡지쟁이인 나는 오타 없는 완벽한 잡지(월간<새가정>, 여성 신앙 가정잡지, KNCC유관기관)을 위해 매일매일 눈에 불을 켜고 글자들을 수색한다.(글자들만? 아니다. 사진들, 그림들, 때로는 행간까지 살핀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한 분이심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오타는 참 잘도 나온다(핑계대는 거, 아녜요). 게다가 어이없는 오타다. "이화학당(여화여자대학)"같은….(새가정 2006년 5월호 57쪽)

오타를 발견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가만있자, 오타뿐만이 아니다. 부주의, 오류, 실수, 시행착오, 생각 짧음 등 불쑥불쑥 나타나는 나의 불완전함은 수시로 나를 일깨운다. 고의적 결함 따위를 기획할 틈도 없다. 그냥 자동으로 결함이 드러나버리니까. 완벽함을 추구하는 잡지쟁이를, 이를테면 '오타의 계시'가 조절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다시 '이 한 권의 책'으로 돌아가자.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는 "우리는 부분적인 것들만 볼 수 있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한다. 즉, 완벽함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 시력이 좋은 사람도 결국 부분만 볼 뿐이다. 부분만 볼 줄 아는 존재가 어찌 완벽함을 논할 수 있겠는가. 시쳇말로 '꼬리내릴' 수밖에.

시험삼아, 의자(걸상)의 완벽함에 대해 이야기해도록 하겠다. 여러분은 좋은 의자, 완벽한 의자란 어떤 의자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앉아있으면 잠이 올 만큼 편안한 의자? 자세를 바르게 해주는 의자? 아니면, 돈 나오는 의자(그냥 한 번 웃어보자고)일까?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는 이상적인 의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이상적인 의자란, 앉아있는 만큼 일어나고 싶게 만드는 의자다. (중략)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싶게 만드는 의자가 더 능률적이며 전반적으로 건강에도 이롭다."(76쪽)

이 잠깐의 시험으로 '아, 우리는 모두 제각각 부분만 보는구나'라는 것을 실감했겠다. 어느 면을 보는가에 따라서 '완벽한 의자'라는 개념은 천양지차(天壤之差)인 것이다. 그래서 곤란하다? 아니다. 그래서 재미있다. 나아가, 다행이다.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는 완벽함보다 무능함에 축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몇 분 안에 인터넷을 통해 시베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치과의사를 찾아내고, 자동차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완충장치의 지지대에 생긴 이상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내며, 불어로 된 메뉴판에 의거해 코스 요리와 와인을 척척 주문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자고 강조한다. 우리는 주위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또는 완벽한지 자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대로, 완벽함을 접고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건 또 쉬울까? 이것도 안 쉽다. 왜냐하면 자기다우려면 정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답기 위해서는 못생긴 얼굴을, 뚱뚱한 몸매를, 키 작음을 자각해야 할 수도 있다. 낮은 지능지수를, 말귀를 못 알아들었음을, 생각이 짧음을 수긍해야 할지도 모른다. 실수했음을, 일을 망쳤음을, 바보 같은 핑계를 대고 있음을 느껴야 하는 때도 있다.

지갑 속에 돈이 적음을, 자신의 능력이 평균보다 못한 것 같은 기분을, 타인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기도 한다. 요소요소 못마땅한 결함 '투성이'인 자기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건, 자기자신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일 못지않게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어느 쪽 어려움을 주로 선택할까? 신은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길 원하실까?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는, 어려움(완전함의 기준에 도달하도록 자기자신을 닦달하기)을 내려놓고 어려움(자기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기)을 붙잡자고 제안한다. 어려움을 내려놓고 훌훌 날아가는 게 자유가 아니란다. 내려놓은 어려움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부여잡아야만 '자유'로워진다는 얘기다. 어째서 우리 주위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그토록 많지 않은지, 조금쯤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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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나이 50
퍼트리샤 튜더산달 지음, 김수경 옮김 / 에코리브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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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십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고 말하고 싶으나 실은 멀지 않았다. 물론 아직은 사십이 더 가깝고 또 아직은 내가 전성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으로 별 탈 없이 하루하루 꾸준히,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오십은 반드시 다가올 것이다. 피해갈 도리는 없을 것이다.

오십은 젊은 것도 또 완전히 늙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다. 그래서일까. 60~70세 정도의 사람에게 지나간 일을 물어보면 열 살,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 삶에 비해 쉰 살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고 한다. <여자 나이 50>을 읽다가 시험 삼아 어머니(현재 66세)에게 여쭈어보았더니, 정말로 쉰 살 전후 몇 년 동안은 별 대단한 일이 없었던 것 같다고 답변하셨다. 오십은 별로 드라마틱한 나이가 아닌가 보다.

1940년생인 퍼트리샤 튜더산달은 <여자 나이 50>에서 50~70세를 영어로 '제3의 연령'이라 부른다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평가받지 못하는 인생의 시기(늙음)에 접어들어, 버려지고 남겨질 것이라 느낄 때 사람들은 저항한다. 적어도 지금의 상태를 지키려 애를 쓴다. 일정 나이를 지나면 우리는 실제보다도 젊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 사람은 이를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기도 한다. 옛날과 똑같다고 설득하려 "나이란 건 말야, 스스로 느끼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허위다. 결국 이렇게 우리는 인생의 전문가, 엑스퍼트(expert)가 될 기회를 놓치고 있다. 엑스퍼트란 본래 '경험이 있는 자'를 뜻하며 경험한 지식을 얻는 것이나 사용한 경험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 23쪽

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쇠약해지면서 늙어가기 시작하는 자기 자신을 솔직히 인정하고 때로는 주위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것, 그게 바로 오십부터 해야 할 원대한 발달과업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오십은 하릴없이 쇠퇴해가기만 하는 연령대라고 보기 어렵다. 원기 왕성한 이십도, 비교적 쌩쌩한 삼십도, 보다 원숙해진 사십도 도무지 감당해낼 수 없는 걸 해내야 하고 해낼 수 있는 연령대일 것이다.

<여자 나이 50>에 의하면 오십이 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임박한 황혼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요한다. 특히 여성은 남성보다 평균 10년쯤 더 살아야 하므로 오십대의 원대한 심리발달과제를 피해가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제 자연으로는 임신을 하기 어려우며 피부는 쭈글쭈글 늘어지고, 무릎관절은 욱신욱신 쑤신다. 거울 속 모습과 마음속에 그리던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다. 튜더산달은 갑자기 다가오는, 늙는다는 깨달음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한다.

자전거가 없어! 누군가 훔쳐간 게 틀림없어! 자전거 주차장에서 내 자전거가 보이지 않자 나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찬찬히 찾아보니 자전거는 거기에 있었다. 단지 그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내가 찾던 자전거는 그것보다 훨씬 새 것이고, 더 깨끗해야만 했다. 내 자전거가 찌그러졌다고? 다 닳아버린 타이어라니? 전조등도 비뚤잖아. 칠이 여기저기 벗겨져있을 리 없는데…. 그런데 들고 있던 열쇠가 딱 맞으면서 내 자전거임을 확인해주었다. - 11쪽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태양은 아직 머리 위에서 비추고 있지만, 밤바람은 이미 불기 시작했으며, 가끔씩 느껴지는 밤의 냉기에 몸서리치는 일도 있다. 늙음의 징조를 깨닫는 것은 바로 이런 때다. -13쪽

우리 모두는 나이 들어간다. 매일매일 조금씩 늙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매일 자신의 나이를 실감하며 살아가는 건 아니다. 아니, 실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의 아이러니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의 많은 나이를 솔직히 인정하는 순간, 바로 그 나이가 주는 (다른 나이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인생의 신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 나이 드는 경험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오십을 성실히 통과할 때 비로소 사람은 지혜로워진다는 것….

이제 눈을 감고 자기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물어볼 일이다. 지금보다 젊어(어려)지길 원하는가? 아니면 지혜로워지길 원하는가? 젊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지혜를 원한다면, 그럼 정작 지혜란 게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지 아는가? <여자 나이 50>은 대답한다. "지혜는 자신의 실제적인 능력과 생활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다. 즉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에 저항하지 않는 것(145쪽)"이라고.

그래, <여자 나이 50>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쩌면, 나이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진심으로 자신이 도로 젊어지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지혜인지도 모르겠다….

 

* 오마이뉴스 책동네 기사로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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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미하엘 유르크스 지음, 김수은 옮김 / 예지(Wisdom)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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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을 교과서를 통해 배웠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크리스마스 휴전'에 대한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하엘 유르크스는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의 멈춘 작은 평화>로 '크리스마스 휴전'을 조목조목, 사료(史料)를 들어가며 증언한다. 그때, 전쟁하다 말고 평화를 추구한 병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 예지
전쟁은 130만 명 프랑스군의 목숨을 앗아갔다. 자크 타르디가 자신의 카툰모음집 <참호전>에서 계산한 바에 따르면 모든 프랑스군 전사자들이 4열로 행진한다면 마지막 사람의 얼굴을 볼 때까지 5박 6일 이상이 걸릴 정도의 숫자였다.(294-296쪽)

각 나라 전사자들을 통틀어 최소한 900만 명 이상이 죽은 이 재앙 속에서 서부전선의 병사들은 '짧게나마(두세 시간 혹은 1년간)' 평화를 창조했다. 1914년 크리스마스를 기하여 각국의 병사들은 각기 제 나라 말로 크리스마스 노래를 합창했고 참호에서 무인지대로 걸어나와 선물을 주고받았으며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었고 즐겁게 축구경기를 했다. 그리고는…, 결국 긴 전쟁기간을 감내하지 못하고 대다수가 죽었다.

유르크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각국의 젊은이들이 전쟁에 선동되어 전선으로 나갔음을 지적한다. 물론 전쟁의 초기, 너도나도 애국심을 자부했다. 대개가 전쟁을 찬성하였다. 모든 서구의 지성인들도 참전을 독려했고 자국의 승리를 배타적으로 확신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만 제외하고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전쟁을 "대중은 선전에 중독되지 않는 한 결코 전쟁을 열망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유르크스는 서부전선의 병사들이 크리스마스를 기해 평화를 일구어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병사들의 전쟁이 아니었고, 병사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8월(전쟁발발시점)의 열광은 오래 전에 죽어버렸다. 그 환상은 진창 속에서 질식했다. 그들은 서로 부르고 볼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살고 죽었다. 이런 가까움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병사들은 1914년 크리스마스에, 자신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사람들 중에는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이 드물다는, 그리고 그런 명령에 따라 총을 쏘아야 했던 사람들은 무기 앞에서는 근본적으로 다 같은 불쌍한 돼지에 불과하다는,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 똑같다는 놀라운 사실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209쪽)

크리스마스는 예수가 탄생한 날이다. 유럽인들 대다수는 크리스마스의 의미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병사들은 바로 그날 서로 하나가 되어 기적을 만들어냈다. 서로 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고, 상부의 명령으로 불가피하게 총을 사용해야 할 경우 엉뚱한 곳을 향하여 발사하기로…. 그들의 평화는 전염성이 강했으나, 그들 상관들의 방해로 인하여 마침내 저지되고 말았다.

1914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군사적 지시들은 모든 사령부의 공통된 외침이었다. 평화에 대한 두려움에 있어서 최고의 군부는 모두 똑같았다. …(중략)…. 어떤 대가(복무위반행위 처벌, 관련 아군장교 사형구형 등)를 치르고서라도 1914년의 ‘방종’이 재현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323-324쪽)

그리하여 1914년에 시작된 전쟁은, 그것이 끝날 것을 두려워한 상관들 때문에 1918년에 가서야 끝이 났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전쟁, 또 전쟁…. 20세기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이제 이 책에 실린 평화의 이야기는 계속 힘있게 증언되어야 하겠다. 1914년과 1918년 사이에 유럽사람들이 모조리 다 전쟁에만 매달려있었던 게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기억 때문에, 어쩌면 앞으로 발발할지 모를 전쟁에 참가하게 될지라도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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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 세상을 향해 뛰어
도나 윌리엄스 지음, 차영아 옮김, 이나미 감수 / 평단(평단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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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폐증(autism)은 원인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질병 중 하나다. 자기공명영상(MRI)를 사용한 최근의 연구는 자폐아의 뇌발달 초기단계에서 이상증세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원인이 다 밝혀졌다고는 할 수 없다. 여전히 자폐증 치료는 실험단계에 있는 것이다.

자폐증 환자들은 간혹 아주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레인 맨>이라는 영화의 레이몬드(더스틴 호프만)를 떠올려보라. 비행기도 타지 못하고, 낯선 환경에 편집증적 반응을 보이는 '덜 떨어진' 레이몬드는 암기력이 비상하며, 숫자계산은 전자계산기 수준으로 정확하고 신속하게 해낸다.

레이몬드와 마찬가지로 자폐증을 가진 또 다른 사람, 도나 윌리엄스가 책을 한 권 펴냈다. 책제목은 그녀 자신의 세계를 묘사하는 듯 'Nobody Nowhere'이라고 지었다. 우리나라 책제목은 <도나, 세상을 향해 뛰어>이다.

과연 자폐증 환자가 세상을 향해 뛸 수 있을까? '자폐(自閉)'라는 한자의 말 뜻 또한 자기 안으로 오므라들어 스스로 갇힘, 바깥환경과의 단절됨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런데 도나는 자신의 자폐성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이라고…. 즉, 그녀는 아주 희귀한 외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끔씩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말을 했고 또 가끔씩은 내게 하는 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말이 기호 같은 것이긴 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기호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나는 말하기에 필요한 모든 체계를 정리해,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나의 언어'라고 여겼다. 내가 사용한 기호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뜻하는 바를 전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58~59쪽)

'이른바 보통사람'과 '자폐아'의 차이란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생긴다. '이른바 보통사람'들도 자폐증을 지닌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잘하지 못한다('이른바 보통사람'들끼리도 매순간 의사소통을 잘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다수의 의사소통방식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폐아 쪽에 더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자폐아들을 '이른바 보통사람'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교육하는 일이 혹, 보통사람의 방식을 자폐아에게 강요하는 모양새는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들의 세계'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나는 거기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참여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내 방식대로여야 할 것이었다. (100쪽)

자폐아에게는 자폐아의 방식이 있다. '이른바 보통사람'들에게 그들만의 방식이 있듯이…. 진정한 의사소통, 진정한 상호작용에서는 한 쪽의 방식만이 통용되거나 하나의 방식만이 유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자폐아에게, 보다 일반적이고 효과적인 상호작용 방식을 익히도록 가르치는 일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번쯤 보통사람들이 자폐아의 방식대로 상호작용을 해보는 건 어떨까? 도나가 한 것처럼.

도나는 지금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면서 자폐아들을 위한 교육에 종사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자폐아들에게 아픈 일인지 알기에, 상호작용의 수위와 밀도를 조절할 줄 안다. 자해하기, 물건 부수기, 같은 동작 반복하기, 발작하기…. 도나는 그것을 다 경험해보았기에 자폐아가 어떤 때, 왜 그런 행동들을 하는지 잘 안다. 그녀가 한 자폐아와 세심하게 상호작용 하는 장면을 본 그 자폐아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다.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르쳐야만 한다고 생각했었죠. 이젠, 그들로부터 많은 걸 배워야 할 사람들은 우리라는 걸 알았어요."

그렇다. 나도 도나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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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남 신드롬 - 사랑하라 잃을 것은 하나도 없다
수잔느 발스레벤 지음, 조희진 옮김 / 북캐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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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사랑을 하는 남녀사이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가 어려야 더 좋고, 여자가 남자보다 키가 작아야 더 좋고, 남자보다 학벌이 더 높지 않을 필요가 있고, 따라서 월급액수도 남자보다는 적은 편이 더 좋다고…. 그런데 정말로 과연 그러할까? 정말로 여자들이 남자보다 덜하고 못해야만 더 좋은 걸까?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여자들이 항상 남자들에게 굴복하고,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이 좋은가?(32쪽)


<연하남 신드롬>은 단지 최근에 유행처럼 번져가는 연하남과 연상녀의 사랑을 감정적으로 찬성하고 또 옹호하기만 하는 가벼운 글이 아니다. <연하남 신드롬>에는 사람 사이의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통찰이 담겨있다. 


현실적으로 어느 누구도 영원한 사랑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형처럼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 성공하여 부유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 이혼을 한다. 우리는 거의 매일 신문의 연예란에서 그들의 이혼사실을 읽을 수 있다.(27쪽)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체로 사람들은, 연상남과 연하녀의 사랑이 보다 더 안전할 거라고들 추측한다. 그래서 연상녀가 연하남을 사랑하면 그들의 주변사람들은 별별 걱정을 다 해준다. 아마도 걱정 반(半), 거부감 반일 것이다. 그러다가, 걱정과 염려가 지나치면 연하남에 대해 있지도 않은 사실을 추정하면서 중상모략하는 경우도 있다.


수잔느 발스레벤은 연상녀와 연하남에 대한 편견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반박한다. “남자구실 못한다, 돈을 노린 거다, 젊은 여자 쫓아가기 위해 결국은 연상녀를 떠날 것이다, 그는 마마보이다” 등등….


편견을 걷어내고 실제현실을 보도록 하자. 실제로 연상녀를 사랑하는 연하남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발스레벤은 우선, 연하남이 마마보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나머지 편견들에 대한 발스레벤의 통찰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특별한 사랑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주변 사람들, 자신의 친구들의 편협하고 고루한 의견과 맞서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지켜내야 한다. 여기에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이 적극성은 마마보이와는 거리가 먼 단어이다.(205)  


다음은, 11살 연상인 여성을 사랑하였고 마침내 그녀의 남편이 된 한 남자의 글이다(결혼 25년).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도 난 우리가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에게 적의를 품었던 사람들도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옳았다. …(중략)…. 당시의 관습에서 샤로테와 내가 사귄 것은 일반적인 규범을 벗어난 충격이었다. 그때 난 내 삶에 있어서 처음으로 부당함이 무엇인지 알았고, 과거 공개재판에 세워진 사람이 어떠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중략)…. 당시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수많은 편견들을 이겨냈다는 사실이 기쁘다.(216-217)”


<연하남 신드롬>은 연상녀를 사랑한 연하남들의 글을 여러 편 싣고 있는데, 그 남자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그들은 편견을 뚫고 자신의 사랑을 지속할 만큼 씩씩하고 독립적인 사람들이다. 또 주위사람들의 비난에 꺾이지 않을 만큼 용감하다. 남성다움의 긍정적인 면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이 자신의 남성다움을 과대포장하거나, 지시하고 명령하는 행위로 과시하지 않을 뿐이다. 


발스레벤은,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에는 장점이 많다고 말한다. 연상의 여자와 결혼하면, 남자는 먹이고 보살피고 명령하고 노동하는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 여자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더 이상 자동으로 주부역할을 떠맡지 않아도 된다.


자신보다 12살 아래인 팀 로빈스와 결혼해 사는 수잔 서랜든은 이렇게 말한다. “난 남자를 결코 나이로 평가하지 않아요. 그 사람의 성격으로 평가해요.”(70쪽)  

 

발스레벤은 연상녀를 향해 말한다.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드디어 마흔 살이 된 지금, 다시 스무 살이 되고 싶은가? 스무 살은 멋진 몸매와 왕성한 욕구를 갖고 있지만 그 외에는 별것이 없다. 삶의 중간쯤에서야 몇 가지 장점이 드러나는 것이다.(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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