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
베로니크 비엔느 지음, 에리카 레너드 사진, 이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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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적 결함, 의도적 실수, 완벽한 결함….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란 말인가.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베로니크 비엔느와 에리카 레너드의 책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가 전해주는 이 말들은 완벽함에 매여있는 이들에겐 그야말로 '복음'(Gospel말고 good news)일 지도 모른다.

"이슬람 예술품 가운데 초호화품 카펫이나 도자기, 모자이크에는 항상 작은 결함들이 존재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오직 신(神)만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작가들은 고의적 결함들을 만들어 넣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18쪽)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장품회사의 상징이 된 코코 샤넬은 (중략) 자연이 우리에게 준 얼굴은 20세의 얼굴이지만 50세의 얼굴은 자기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믿었다. 눈가의 잔주름이나 얼굴주름, 웃음자국 등이 전혀 없으면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샤넬은 '여자에겐 사랑스러운 흠이 있어야 한다'고 일축했다."(36쪽)

내 이야기를 좀 해보자. 잡지쟁이인 나는 오타 없는 완벽한 잡지(월간<새가정>, 여성 신앙 가정잡지, KNCC유관기관)을 위해 매일매일 눈에 불을 켜고 글자들을 수색한다.(글자들만? 아니다. 사진들, 그림들, 때로는 행간까지 살핀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한 분이심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오타는 참 잘도 나온다(핑계대는 거, 아녜요). 게다가 어이없는 오타다. "이화학당(여화여자대학)"같은….(새가정 2006년 5월호 57쪽)

오타를 발견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가만있자, 오타뿐만이 아니다. 부주의, 오류, 실수, 시행착오, 생각 짧음 등 불쑥불쑥 나타나는 나의 불완전함은 수시로 나를 일깨운다. 고의적 결함 따위를 기획할 틈도 없다. 그냥 자동으로 결함이 드러나버리니까. 완벽함을 추구하는 잡지쟁이를, 이를테면 '오타의 계시'가 조절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다시 '이 한 권의 책'으로 돌아가자.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는 "우리는 부분적인 것들만 볼 수 있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한다. 즉, 완벽함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 시력이 좋은 사람도 결국 부분만 볼 뿐이다. 부분만 볼 줄 아는 존재가 어찌 완벽함을 논할 수 있겠는가. 시쳇말로 '꼬리내릴' 수밖에.

시험삼아, 의자(걸상)의 완벽함에 대해 이야기해도록 하겠다. 여러분은 좋은 의자, 완벽한 의자란 어떤 의자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앉아있으면 잠이 올 만큼 편안한 의자? 자세를 바르게 해주는 의자? 아니면, 돈 나오는 의자(그냥 한 번 웃어보자고)일까?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는 이상적인 의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이상적인 의자란, 앉아있는 만큼 일어나고 싶게 만드는 의자다. (중략)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싶게 만드는 의자가 더 능률적이며 전반적으로 건강에도 이롭다."(76쪽)

이 잠깐의 시험으로 '아, 우리는 모두 제각각 부분만 보는구나'라는 것을 실감했겠다. 어느 면을 보는가에 따라서 '완벽한 의자'라는 개념은 천양지차(天壤之差)인 것이다. 그래서 곤란하다? 아니다. 그래서 재미있다. 나아가, 다행이다.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는 완벽함보다 무능함에 축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몇 분 안에 인터넷을 통해 시베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치과의사를 찾아내고, 자동차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완충장치의 지지대에 생긴 이상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내며, 불어로 된 메뉴판에 의거해 코스 요리와 와인을 척척 주문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자고 강조한다. 우리는 주위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또는 완벽한지 자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대로, 완벽함을 접고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건 또 쉬울까? 이것도 안 쉽다. 왜냐하면 자기다우려면 정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답기 위해서는 못생긴 얼굴을, 뚱뚱한 몸매를, 키 작음을 자각해야 할 수도 있다. 낮은 지능지수를, 말귀를 못 알아들었음을, 생각이 짧음을 수긍해야 할지도 모른다. 실수했음을, 일을 망쳤음을, 바보 같은 핑계를 대고 있음을 느껴야 하는 때도 있다.

지갑 속에 돈이 적음을, 자신의 능력이 평균보다 못한 것 같은 기분을, 타인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기도 한다. 요소요소 못마땅한 결함 '투성이'인 자기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건, 자기자신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일 못지않게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어느 쪽 어려움을 주로 선택할까? 신은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길 원하실까?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는, 어려움(완전함의 기준에 도달하도록 자기자신을 닦달하기)을 내려놓고 어려움(자기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기)을 붙잡자고 제안한다. 어려움을 내려놓고 훌훌 날아가는 게 자유가 아니란다. 내려놓은 어려움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부여잡아야만 '자유'로워진다는 얘기다. 어째서 우리 주위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그토록 많지 않은지, 조금쯤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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