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D]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백소영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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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이 의(義)롭기 위하여>는 한국의 젊은 여신학자 백소영이 한국 무교회에 관하여 설명한 책이다. 그녀는 무교회를 공부한 사람답게 지금 현재 '무'직(無職)이다. 그녀는 앞으로도 쭉 그렇게 정규직 아닌, 프리랜서 여신학자로 살고 싶다 말한다.

감리교인이자 목사 딸이었던 백소영은 스물여섯 살까지 교회 안에서 살았다. 목사의 집이 교회 안에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리적·물리적으로 교회 안에서 생활했던, 다시 말해 '유'교회로 살았던 그녀가 '무'교회를 말한다니, 조금 의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무교회는 교회공동체 없이 따로따로 신앙 생활을 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무교회는 신앙공동체이며 성서공부를 그 중심으로 한다. 단, 제도화를 거부할 뿐이다. 백소영의 요약에 의하면 한국 무교회정신은 "안주하려는 것, 굳히려는 것, 변하지 않으려는 것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의 정신"이다. 무조건 교회를 반대하고 나선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무교회'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김교신, 함석헌 등 한국 무교회의 주요인물들로 거론되는 이들은 일제치하 우찌무라 간조의 성서모임에 참여했던 일본유학생들이다.

백소영은 김교신의 '한국산' 기독교 사상, 함석헌의 '씨알(아래아)' 공동체를 차근차근 살피면서 한국 무교회의 역사를 옛날 이야기하듯 해준다. 실제로 그녀는 이야기투로 책을 썼다. 이야기투라고 해서, 주절주절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늘어놓았느냐? 아니다. 이런 식이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함석헌 님은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성서적이고자 했던 한국 무교회운동에서, 김교신 님으로부터 그 바통을 전해받은 선수라고, 그리고 더 멀리 뛰었다고 했지요. '멀리 뛰려다가 아예 기독교 밖으로 뛰었군'하고 더 이상의 관심을 접으려는 분들도 많으실 거예요.

다시 한 번 그 판단을 잠깐 멈추고서 이 장을 읽어주십사 부탁드려봅니다. 벌써 결론을 내리고 마음을 닫아버리시면, 믿음과 시대와 전통을 함께 안고 눈물겹게 투쟁하며 가장 한국적이며 동시에 가장 신앙적이고자 했던 한 무교회인(저는 그리 믿어요)의 노력을 들어보지도 않고 묵살하는 것이잖아요.(187쪽)


저자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같은 대학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보스톤 대학교에서 종교사회윤리학(전공)과 비교신학으로 박사학위(Th. D)를 받았다.

백소영은 길가의 콩나물 파는 할머니도 듣고 "그 말 참 옳소이다" 할 수 있도록 쓰고 말하면 좋겠다(278쪽)고 믿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그녀의 책은 편안하게 읽히고, 쉽게 머리에 들어온다. 합리성과 논리성은 어렵거나 딱딱한 글만 갖출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녀는 무교회가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놓고 있다. 첫째, 한국적이며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김교신과 함석헌의 예에서 보듯 이 두 가지 정체성은 완전히 별개가 아닐 수 있다. '한국적'이려는 것과 '기독교적'이려는 것이 서로를 견제하고 강화시키면서 언제나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게 백소영의 주장이다.

둘째, 이성적이어야 한다. 비판의식이 없는 뜨거움'만'의 공동체는 역사와 현실에 둔해지기 때문이다. 셋째, 세속사회를 살면서 거룩함을 실천해야 한다. 그간 교회는 경제적·사회적 성취를 위해서는 세속인들보다 더 기민하고 약게 세속적 법칙들을 적용하고, 반면 비인간적이고 부정의한 사회현실에 대해서는 세상을 초월하여 초연히 성스러움을 지켜왔다. 이제는 그러한 선택적 이원론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 평신도 중심의 평등한 교회를 형성해야 한다. 목사 중심으로 체계를 세우고 목사에게 의존하다가 결국은 목사 아들(또는 사위)에게까지 대를 이어 충성하려는 시도(교회세습)는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웃지 못할 현실'이다. 다섯째, 교파를 지양하고, 여섯째, 제도화되지 않아야 한다.

무교회를 연구한 백소영이 정리한 여섯 가지 제안은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본 비판이기도 하다. 실제로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대하여 위와 같은 비판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들이 아직 귀기울여 듣지는 않고 있지만….

백소영은 이 책의 부제를 '한국교회가 무교회로부터 배워야 할 것들'이라고 해놓았다. 그러나 무교회에 대해 한국교회는 무지하다. 그러니 위의 여섯 가지 제안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무교회로부터 배우기는커녕 덮어 놓고 무교회를 배척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무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교회는, 백소영의 연구를 통해 본 결과 매우 성서적이며, 철저하게 기독교적이다.

그런데 실제로 무교회 관련 자료들은 상당히 어렵다. 무교회인들은 성서를 원어(히브리어, 헬라어)로 읽을 만큼 학구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야기라도 읽기가 어려우면 아무 소용이 없다. 무교회 관련서적 중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는, 무교회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들의 '첫길잡이 책'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오마이뉴스에도 기사로 올렸습니다. 제 리뷰는 오마이뉴스에 올리는 기사와 매번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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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네 여자 - 그리스도 기원 이래 가톨릭교회의 여성 잔혹사
기 베슈텔 지음, 전혜정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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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네 여자>는 ‘그리스도교 기원 이래 가톨릭교회의 여성잔혹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기 베슈텔(Guy Bechtel)은 이 책에서 여성들에 대한 잔혹한 역사를 파헤치면서도 격렬한 논조를 전혀 쓰지 않는다. 분노할 만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분노하는 데에 쓸 에너지를, 여성잔혹사의 다양한 측면을 제대로 제시하는 데에 투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여자들을 태생에서부터 열등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어머니는 칭송받지 않았느냐고? 역사학자 베슈텔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가톨릭교회는 어머니, 즉 모성을 칭송한 적이 없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암브로시우스(340-397)는 “석녀(石女)들이여 행복할지어다!”라고 하면서 처녀성을 옹호했다. 가톨릭교회는 공개적으로, 어머니생활보다는 독신생활을 예찬했다. 성모 마리아 숭배? 모성 숭배 아니었다. 성모 마리아는 ‘아기를 낳고서도 처녀!’였다. 이 세상 그 어떤 어머니도 성모 마리아하고는 안 비슷하다.

“어머니는 천국에 이르기 가장 어려운 존재로 취급되었다. 처녀도 수녀도 성녀도 될 수 없었던 까닭에 여자는 어머니가 되었던 것이다.”(35쪽)

교회는 여자들을 네 종류의 여자들로 분류하였다. 이리하여, 이른바 ‘신의 네 여자’가 구상되었다. 창녀, 마녀, 성녀, 그리고 바보.

교회는 창녀를, 너무 음란하다며 드러내놓고 싫어했다. 여기서 창녀는 굳이 직업적 매춘여성만이 아니었다. 모든 여성이 창녀로 취급되었다. 가톨릭신부들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죄의식을 조장했다. 그렇게 성을 지나치게 백안시하다가 급기야는 출산률이 뚝 떨어지는 사태를 불러오기까지 하였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은 외설적인 괴물로 취급되어왔다. “타락한 여자의 집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말은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모든 여자들이 타락한 여자들과 동일시되었다.(175쪽)

교회는 마녀도 싫어했다. ‘악마가 여자를 선호한다’는 해괴한 신념이 팽배했는데, 그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은 제대로 된 재판조차 거치지 못한 채 죽어갔다. 잔인한 마녀사냥은 그리스도교가 생활 전반을 지배했던 중세시대가 아니라 16세기와 17세기 동안에 주로 행해졌다. 교회에 자주 가지 않는 여자들은 자주 가지 않는다고, 교회에 너무 자주 드나드는 여자는 너무 자주 드나든다고 마녀로 의심받았다. 특별히 과부가 많이 살해되었다. 형리들은 말하였다. “자백을 하라. 아니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문할 것이다.” 자백을 하면 마녀로 죽었고, 자백을 안하면 고문당해서 죽었다.

집안에 남자가 없는 까닭에 성적 욕구불만으로 신랄해진 과부는, 유혹에 빠진 사람이 경험하는 쾌락 즉 수많은 신학자들을 몽상에 빠지게 했던 과거의 희열을 되씹어 추억한다고 여겨졌고 따라서 과부는 사회불안요소가 되었던 것이다.(219쪽)

그렇다면 교회는 세 번째 여자, 성녀는 존경하였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신과 교섭하는 여성은 매번 의심을 받았다. 수녀원은 거의 감옥이었으며,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한 번 들어가면 평생 그 안에 감금되어 살아야만 했다. 또한 남자사제들은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지만, 수녀들에게는, ‘토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안되기 때문에’ 가톨릭교리나 신학을 가르치지조차 않았다.

마지막으로 바보. 바로 이 바보를, 교회는 제일 좋아하였다. 일자무식에다가 못생겼고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 여성, 분명한 촌스러움에다가 충직하기 이를 데 없는 순박한 얼간이, 교회는 바로 이러한 여인을 사랑하였다. 베슈텔은 의미있게 지적한다. “못생긴 동정녀란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아름다운 여인들을 원하지는 않았다(337쪽)”고. 한편 교회는 여성들을 가르치려고 들지 않았다. 13세기 중반 필립 드 노바르는 이렇게 말했다.

특별히 수녀를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여자에게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여자들이 읽기나 쓰기를 배움으로써 많은 해악이 생겼기 때문이다.(365쪽)

교회가 매우 끈질기게, 또 악랄하고 집요하게 여성들을 비하하고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이천 년 동안 여성들은 교회의 주요구성원으로서 지내왔다. 그러나 베슈텔은, 이제부터는 여성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성들이 더는 참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잔혹한 행위에 대하여 여성들은, 더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용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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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하여
페터 라우스터 지음 / 아침나라(둥지)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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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완전히 열려있을 때, 모든 감각이 깨어있을 때, 영혼이 느낄 태세가 되어있을 때, 내가 나날이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고 상처받을 수 있을 때, 오직 그럴 때만 사랑은 가능하다."(38쪽)

페터 라우스터의 <사랑에 대하여> (아침나라, 1999)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둘 것은 이 책이 이른바 '작업'을 부추기는 서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말하는 '작업'이라는 게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끌어내는 효과적인 행위(유혹적 행위)를 지칭한다면, 이 책은 그 '작업'에 필경 방해가 될 것이다. 바로 그 '작업'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으니까.

라우스터는 사랑을 시작할 때 두 사람이 제각각 원하는 것들을 제쳐둘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그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안정'을 지향하지 않을 때 사랑을 전개할 수 있다(39쪽)고까지 말한다. 라우스터의 '이유있는' 반론들을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성(性)은 사랑이고 성적으로 자유로우면 우리는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성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낙관하거나, 만족한 사랑을 위해서는 성행위 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라우스터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사실상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성행위를 통해 생리적 쾌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부부 간의 사랑 문제를 성행위 기술로 극복하려고 하는 수많은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성행위 기술이 전혀 안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성행위 기술에 대한 과대평가나 터무니없는 신봉 때문에 사랑을 느낄 수 없어지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라우스터는 강조한다. 사랑은 창조적이어서 적절한 순간에 가장 올바른 방법을 찾아낸다(29쪽)고.

둘째, 사랑을 젊은 시절 한때의 일로만 보고,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운명적 사건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노년에 들어서는 순간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감성은 늙지 않는데, 사람들은 육체의 늙음으로 감성의 늙음을 추정한다. 아니 확정한다. 라우스터는 영혼이 무뎌지지 않는 한 언제든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셋째, 사랑에는 질투가 따르게 마련이라고 믿는 경우가 아주 비일비재하다. '필수적인(!) 질투'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의 무방비상태다. 남편의 낚시, 부인과 대화를 잘 나누는 친구들, 상대방의 취미와 상대방이 집중하는 일련의 행동들에 사람들은 질투심을 느끼곤 한다. 상대방의 모든 시간을 다 독차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사랑에는 역시 질투가 필수적이야"라고 중얼거린다.

라우스터는 질투는 사랑의 필수요소가 아니라고 날카롭게 분간한다. 질투의 감정은 상대방을 잃을 것이라는 불안이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사랑에 대하여 '그런 줄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반론을 단다. 그 반론들마다 이유가 타당하며 명쾌하다. 그 반론들을 쭉 추진해가며 사랑에 대하여 라우스터가 마침내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내가 사랑의 보답을 기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서 사랑의 보답이 없는 것이 나를 좌절시키지 않는다. 나의 독선적 자아가 휴식하게 된다."(213쪽)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마땅하다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현실에 폭력을 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208쪽)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사랑을 위해 사랑하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만이 정말로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은 어렵다'는 말이 또 들린다. 자기자신을 한 번 믿어보는 것이 정말 그토록 어려울까? 내가 처음 스키화를 신었을 때 작은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일은 어려워보였다. 그러나 조금씩 배우고 처음의 불안들을 극복하는 것은 지극한 기쁨이 아니겠는가?"(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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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인생이여
셰리 카터 스콧 외 지음, 채세진 옮김 / 명진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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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흘째 아프다. ‘비, 인후’가 하나같이 아프고 골치도 아프다. 감기 탓이다. 코를 풀고 기침과 재채기를 번갈아 하면서, 나는 계속 중얼거린다. 좀더 따뜻하게 입고 다닐걸, 평소 귀찮아하지 말고 비타민제를 잘 먹어둘걸, 감기 바이러스는 하필이면 이런 때(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에 나한테 들어와서 말썽이냐 등등….

감기로 인한 아픔 위에다가 불평불만까지 쌓아올리자, 내 마음에서는 평화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내가 직접 느끼고 있는 아픔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심하게 아플 땐 ‘내가 감기로 죽겠구나’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떠오른다. 감기에 걸려있는 동안의 내 인생은 말 그대로 ‘지옥’인 것만 같다. 나의 감기‘투병중’은 지옥‘체험중’과 통한다. 평화로움과 마음의 여유 그리고 자유를 잃어버린 곳, 그곳이 바로 지옥이니.

그런데, 감기‘투병중’에 읽은 책 <고마워요, 인생이여>에는 ‘지옥 운운’이 없다. 한낱 감기에도 ‘지옥 운운’하며 엄살떨고 있었던 나, 정신이 버쩍 든다.

<고마워요, 인생이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불행한 현실이 다가왔는데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불쾌한 현실 너머에 있는 희망을 끝내 알아본다. 시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신뢰, 즉 믿음(trust)에 관한 이야기다.

<고마워요, 인생이여>는 당장 눈앞에 뻔히 보이는 고통과 시련을 눈앞에서 ‘그냥 치워버릴 수 없음’을 알아챈 어떤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믿음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믿음은 ‘현실이 이러이러하고 믿을 만하니까, 믿는다’가 아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조사하거나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만들어내는 결론 같은 게 아닌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비합리적’인 소망이고 의지이다.

바로 이 믿음이, 발과 다리에 감각이 없는 여인을 곡예비행교관이 되도록 이끌었다(챔피언의 화려한 비상).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모녀를 만나게 했다(아름다운 해후). 또한, 산산조각난 다리뼈로도 마침내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고(하나님 이 아이를 구원하소서), 두 팔이 없는 그녀와(아름다운 그녀 노부코), 두 다리가 없는 그녀가(접시에 담은 사랑)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도록 북돋아주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은, 지금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 엄마가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는 갓난아기의 마음상태를 가리켜 ‘기초신뢰감(Basic trust)’이라 하였다. 갓난아기 때 기초신뢰감이 무리없이 잘 형성되면 희망(Hope)이라는 덕목(Virtue)을 갖추게 된다. 희망은 삶을 살아가는 힘이다. 희망이 없다면, 즉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살아가기 어려워한다(자살은, 희망을 잃어버린 자의 자기표현일지도 모른다). 기초신뢰감은 희망의 바탕이다.

우리는 엄마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으며, 사라져버리지 않음을 정말로 믿는가? 우리는 행복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으며, 사라져버리지 않음을 정말로 믿는가? <고마워요, 인생이여>는 바로 그 ‘믿음에 대하여’ 묻고 또 묻는다.

“당신은 행복이 안 보여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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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전집 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오진숙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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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이라는 단어는, 굳이 울프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두 번쯤은 들어보고 말해봤음직한 단어다. 울프는 책의 서두에서 “저녁식사를 잘하지 못하면 사색을 잘할 수 없고, 사랑도 잘할 수 없으며,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라고 털어놓는다. 여기서 잘하는 저녁식사란 ‘정성어린 손맛’보다는 식탁을 잘 차려낼 수 있는 능력, 즉 돈과 직접 결부되어있다.

울프는 중세 때 설립된 남자대학과 19세기 말에 세워진 여자대학의 설립기금 모금속도(또는 난이도)와 식탁을 비교하며 돈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남자대학은 대학설립기금을 여자대학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모았으며, 남자대학의 오찬은 여자대학의 정찬보다 훨씬 다양하고 영양가있는 음식들로 구성되어있다. 이제 <자기만의 방>은 본격으로 이야기의 풀어나간다. 돈,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 대해서.

울프는,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중산층 이상 출신 여성(에이프러 벤, 도로시 오스본 등)의 작품들과 조지 엘리어트, 에밀리 브론테,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을 언급(비평)한다. 그러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여성이 픽션을 쓴다는 것은 여성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울프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性)을 염두에 두면 필연적으로 살아남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창조적 예술이 이루어지는 곳은 여성과 남성을 ‘넘어서는(내지는 결합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이 픽션을 쓴다는 것은, 여성이 여성(의 역할)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인간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만의 방>에서는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줄곧 강조된다. 그런데, <자기만의 방>이 여성들에게 힘주어 말하는 것은 ‘인생목표 : 연간 500파운드, 자기만의 방’뿐인가? 그렇지 않다.

“나의 마음 속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나는 남성의 동료라든가 남성과 대등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고귀한 감정을 찾을 수 없고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세상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결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주디스’라는 누이가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를 상상한다. 울프의 상상 속에서 주디스는 젊어서 죽었고, 슬프게도 글 한 줄 쓰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코끼리 동물원 맞은편 버스정류장에 묻혔다.

그러나 울프는, 그 교차로에 묻힌 주디스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선언한다. 주디스는 여성들 속에, 울프 자신 속에, 오늘밤 그릇을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잠재우느라 바쁜 여성들 속에 살아있다고 증언한다.

“그녀는 살아있지요. 위대한 시인들은 죽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계속 현존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들 속으로 걸어들어와 육체를 갖게 될 기회를 필요로 할 뿐입니다.”

그런데 주디스는 우리 여성들의 결단(여성이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이 없이는 출현하지 않는다. “주디스는 분명히 오지만, 거저 오지는 않는다.” 이것이 <자기만의 방>이 뿜어내고 있는 열정이자, 결론이다. 그리고 그 결론은 울프가 살았던 20세기의 것이기도 하고, 지금 21세기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도 여전히 주디스 출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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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2-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 전집 눈여겨 보고 있는데, 좋은 리뷰네요.
사실, 대학교때 읽었을때와 얼마나 다른 느낌일까 겁나서 못 읽고 있었어요.
땡스투 눌러드리고 갑니다.

균형 2005-12-22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