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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인생이여
셰리 카터 스콧 외 지음, 채세진 옮김 / 명진출판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사나흘째 아프다. ‘비, 인후’가 하나같이 아프고 골치도 아프다. 감기 탓이다. 코를 풀고 기침과 재채기를 번갈아 하면서, 나는 계속 중얼거린다. 좀더 따뜻하게 입고 다닐걸, 평소 귀찮아하지 말고 비타민제를 잘 먹어둘걸, 감기 바이러스는 하필이면 이런 때(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에 나한테 들어와서 말썽이냐 등등….
감기로 인한 아픔 위에다가 불평불만까지 쌓아올리자, 내 마음에서는 평화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내가 직접 느끼고 있는 아픔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심하게 아플 땐 ‘내가 감기로 죽겠구나’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떠오른다. 감기에 걸려있는 동안의 내 인생은 말 그대로 ‘지옥’인 것만 같다. 나의 감기‘투병중’은 지옥‘체험중’과 통한다. 평화로움과 마음의 여유 그리고 자유를 잃어버린 곳, 그곳이 바로 지옥이니.
그런데, 감기‘투병중’에 읽은 책 <고마워요, 인생이여>에는 ‘지옥 운운’이 없다. 한낱 감기에도 ‘지옥 운운’하며 엄살떨고 있었던 나, 정신이 버쩍 든다.
<고마워요, 인생이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불행한 현실이 다가왔는데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불쾌한 현실 너머에 있는 희망을 끝내 알아본다. 시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신뢰, 즉 믿음(trust)에 관한 이야기다.
<고마워요, 인생이여>는 당장 눈앞에 뻔히 보이는 고통과 시련을 눈앞에서 ‘그냥 치워버릴 수 없음’을 알아챈 어떤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믿음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믿음은 ‘현실이 이러이러하고 믿을 만하니까, 믿는다’가 아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조사하거나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만들어내는 결론 같은 게 아닌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비합리적’인 소망이고 의지이다.
바로 이 믿음이, 발과 다리에 감각이 없는 여인을 곡예비행교관이 되도록 이끌었다(챔피언의 화려한 비상).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모녀를 만나게 했다(아름다운 해후). 또한, 산산조각난 다리뼈로도 마침내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고(하나님 이 아이를 구원하소서), 두 팔이 없는 그녀와(아름다운 그녀 노부코), 두 다리가 없는 그녀가(접시에 담은 사랑)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도록 북돋아주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은, 지금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 엄마가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는 갓난아기의 마음상태를 가리켜 ‘기초신뢰감(Basic trust)’이라 하였다. 갓난아기 때 기초신뢰감이 무리없이 잘 형성되면 희망(Hope)이라는 덕목(Virtue)을 갖추게 된다. 희망은 삶을 살아가는 힘이다. 희망이 없다면, 즉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살아가기 어려워한다(자살은, 희망을 잃어버린 자의 자기표현일지도 모른다). 기초신뢰감은 희망의 바탕이다.
우리는 엄마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으며, 사라져버리지 않음을 정말로 믿는가? 우리는 행복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으며, 사라져버리지 않음을 정말로 믿는가? <고마워요, 인생이여>는 바로 그 ‘믿음에 대하여’ 묻고 또 묻는다.
“당신은 행복이 안 보여도 믿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