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평점 :
일시품절


 ‘남의 살’을 먹기 전에…
                피터 싱어·짐 메이슨, 『죽음의 밥상』

                                      
초등학생 때 나는 문득 귀찮길래 해피라는 강아지의 배를 힘껏 걷어찬 적이 있었다. 저만치 나동그라진 해피가 죽을 만큼 아파하는 바람에 나는 “미안해, 해피”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했더랬다. 고등학생 때는 낮잠을 자다가 무심코 고양이 아롱이를 깔아뭉갠 적도 있었다. 압사당할 뻔했던 아롱이가 서럽게 울부짖으며 실내를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날 나는 “아롱아, 아롱아, 모르고 그랬어”하고 몇 번이고 사과를 해야 했었다.

강아지 해피도 고양이 아롱이도 고통이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생명체다. 그러면 ‘고기’로 키워지는 닭, 돼지, 소는 고통이나 행복에 대해 어떨까? 정답은 그들도 고통이나 행복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8324번 닭은 닭고기로, 513번 돼지는 돼지고기로, 그리고 A열 96번 송아지는 쇠고기로 알려지다 보니, 고통이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동물로 선뜻 인지되지가 않는다. 쫀득쫀득하거나 통통한 육질 좋은 고기, 가정에서부터 고급식당에까지 잘 공급되어야 할 식재료일 뿐이다. 그래서 광우병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광우병 쇠고기의 문제이며, 조류인플루엔자(AI) 발병은 우선 닭고기의 안정적 공급을 저해하는 사건사고로 인지된다. 누구도, 광우병에 걸린 소 한 마리,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린 닭 한 마리의 입장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이들이 해피도 아니고 아롱이도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죽음의 밥상』을 읽어보라. 바로 그 한 마리 한 마리의 입장이 저절로 감지된다.

『죽음의 밥상』은 학자 피터 싱어와 농부 짐 메이슨이 한 팀이 되어 발로 뛰며 미국의 공장식 축산업현황을 조사해 써낸 책이다. 미국의 공장식 생산구조에서, 풀 먹는 동물인 소는 풀을 못 먹는다. 곡식(옥수수)을 주식으로 먹고 심지어 고기류와 어패류가 무차별적으로 섞여있는 레스토랑 접시쓰레기와, 닭털과 닭똥 등 닭장쓰레기까지도 처분할 겸 먹어주던 끝에 결국 미쳐가고 있다. 닭은 평생을 인구밀도 아니 조류밀도가 높은 닭장에서 스트레스 잔뜩 받으며 살다가 의식이 있는 채로 목이 잘리거나 산 채로 능지처참(몸이 여러 토막으로 찢김)되어 생을 마감한다. 또, 호기심 많은 돼지는 자기 체구에 꼭 맞게 제작된 비좁은 이 상자 저 상자를 전전하며 옴짝달싹도 한 번 햇볕 구경도 한 번 못 해보고 지내다가 도살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좁은 울타리 안에 감금되는 그들은 흙은커녕 아무 바닥에서도 걸어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관절염 등 만성적 뼈질환에 시달리는 게 다반사고, 죽음에 임박해서는 물건처럼 인정사정 없이 해치워진다.

이런 사정은 물고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물에 잡혀올라오는 물고기들 중 인기없는 ‘생선’들은 상처입은 그대로 다시 내던져지며, 내장이 파열되고 몸통이 너덜너덜해져도 눈알이 기압의 변화로 튀어나와 덜렁거려도, 아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양식되는 물고기의 경우 넓은 바다 놔두고 밀집된 공간에 갇혀지내야 하기 때문에 짜증과 스트레스가 많다. 그래서 탈옥(?)을 감행하는 물고기가 많은데 호르몬제와 항생제에 찌들어 살던 이 탈옥수들은 건강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야생물고기에게 다가가 전염병을 옮기거나 유전자변이를 일으키게 하는 등 또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탈옥에 실패한 물고기들은 맛 좋은 살코기가 될 때까지 죽거나 병에 걸리면 안 되므로 엄청난 화학약품을 투여받으며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해간다.

딴에는, 그 동물들이 어차피 고기가 될 처지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곧 고기가 될 처지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무심히 ‘재배’되다가 때가 되어 무참히 ‘처치’되는 게 괜찮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사실, 공포나 고통으로 그들이 소리소리 비명을 질러도 도살담당자들은 소나 돼지, 닭들이 편안하게 죽도록 배려할 수가 없다. 비용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동물들을 기절시켜 무의식상태가 되게 한 후, 이를테면 ‘윤리적으로 동물들을 도살’하려면 추가비용이 들어가는데, 그 순간 고깃값은 뛰게 된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가격상승을 용납하기 어려워한다. 오히려 같은 무게의 고기일 때 조금이라도 싼 쪽을 선택한다. 도살담당자들이 자행하는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도살방법을 비난할 사람들은 많지만, 그 동물들이 윤리적으로 도살될 수 있도록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비용지불을 감수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긴 하나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동물들의 비참한 일생·처참한 죽음은,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려는 경제원칙 하에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있는 데에서 기인된 총체적인 부도덕 같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 28)”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비윤리적으로 키우고 잔인하게 도살해도 된다는 뜻, 거대한 그물로 물고기들을 싹싹 다 거두어 씨를 말리라는 뜻까지 ‘다스리라’에 들어있을까. 지역개발이다 대운하다 해서 동식물들이 멸종해버리고 나면 다스리고 싶어도 다스릴 수가 없을 텐데….

저자들은 미국인들로서 『죽음의 밥상』을 통해 미국소비자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먹느냐에 대해 보다 양심적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방법들이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실천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20쪽). 도대체 어떤 방법들이길래 그럴까? 한국은 미국보다 나을까? 이런 질문들을 해보며 저자들이 제시하는 방법들을 검토해보면 좋겠다 싶어 몇 가지만 옮겨적어본다.

동물성식품을 살 때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반드시 그 식품이 나온 농장을 방문해본 경우에만 산다. 동물학대에 전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려면 그 어떤 ‘남의 살’도 먹지 않는 완전한 채식주의자(베건, vegan)가 된다. 제철농산물이자 로컬푸드(이 달 주제글, 20∼21쪽 참조)를 산다. 한편 때로는 가난한 나라 농장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수입산을 직접 구매하는 편이 더 윤리적인 선택일 수 있음을 감안한다. 물론 가난한 나라의 농장노동자들이 식품공급을 위해 착취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필히 조사해보아야 한다. 식품소비자의 돈이 실제로 식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손에 더 많이 들어가는지 알아본다. 그래야만 지속가능한 농업이 힘을 얻는다. 이밖에 더 많은 실천사항들을 알고 싶다면 『죽음의 밥상』을 직접 읽기 바란다.

     우리는 모두 식품의 소비자들이며,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식품업체들이 유발하는 공
     해와 연관이 있다. 60억 명의 인구에 미치는 영향 말고도, 식품산업은 매년 500억 이상
     의, 인간이 아닌 육지동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전생애를 구속받고 있으며, 계획에 따라 태어나 공장의 부품과 같이 살다가 살육되는
     길을 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수십억 마리의 물고기가, 그리고 다른 해양생물들이
     바다에서 떠내어져,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토막나고 있다. 화학물질과 호르몬제는
     강과 바다에 흐르고, 조류독감과 같은 병이 번진다. 농업은 거의 모든 생명에
     손을 뻗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내린 먹을거리 선택으로 빚어진
     일이다. 더 나은 선택은 가능하다. 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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