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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사건이 단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고 운명과의 사투를 벌이게 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책을 좋아하는 이의 눈을 고정시키고 마음을 사로잡게 마련이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과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장서관을 동경하는 이라면 이 책 첫장에 나오는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매혹적인 이름을 접한 즉시,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책의 마법에 걸리어 주인공을 따라 훌리안 카락스라는 검은 그림자의 자취를 뒤쫓는 모험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 모험은 우리의 눈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우리의 수면을 빼앗고 호흡마저 잊게 한다.
다니엘 셈페레는 열 살 무렵 그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가게 된다. 그곳의 규칙에 따라 그는 한 권의 책을 선택하게 되고 그가 선택한 책이 그의 성장과 함께하며 작가의 말마따나 그의 기억에 하나의 궁전을 새겨놓게 된다. 다니엘이 책들의 무덤에서 빛의 세계로 끄집어낸 그 책은 단 한 권 밖에 남지 않은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다. 책에 매료된 다니엘은 작가의 다른 책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훌리안의 책을 모조리 찾아 불태워 없애는 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니엘 역시 그 존재와 맞닥뜨리게 되며 그 모든 위협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려 훌리안의 과거의 발자취를 뒤쫓게 된다.
이 책은 한 소년의 성장 소설이기도 한 반면, 다니엘과 훌리안 카락스의 병렬된 운명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서스펜스물이기도 하다. 다니엘을 둘러싼 모든 사건이 내전 전후의 스페인 바로셀로나를 배경으로 사랑과 배신과 증오와 슬픔으로 점철된 회색빛 거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사건들의 근본원인이 바로 사랑임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낭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스티븐 킹의 코멘트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랑을 하고 배신을 당하고 서로를 증오하고 끝내는 파멸에 이르기도 한다. 그들의 슬픔과 절망이 뒤섞인 뿌연 안개가 커튼처럼 내려와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거리의 암흑의 농도를 더욱 짙게 만든다. 그 거리에서 주인공과 함께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때론 두려운 마음으로 또 슬픈 마음으로 길을 헤매어 다녔다. 밤부터 새벽까지 그렇게 먼 이국땅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돌아다니다 나는 스르르 잠이 들곤 하였다.
이렇듯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오랜만에 활자가 눈을 빨아들이는 듯한 대단한 흡입력과 거침없이 술술 읽히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해주는 역자의 유려한 번역과 작중 인물, 특히 페르민의 화려한 언변과 유머, 풍부하고 아름다운 수사에 몇번이나 감탄을 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할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져가고 있다고'' 작가가 한 인물의 입을 통해 드러낸 독서관을 유심히 되새겨본다.
나는 지금 내 앞에 놓인 두 권의 책을 마주하고 있다. 하나의 이름으로 된 같은 표지의 책. 안개낀 회색빛 거리를 부자지간으로 보이는 듯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사진이 이 책의 표지다.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집어들 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 표지 때문이었다. 바람의 그림자라는 제목과 사진이 주는 그 음울하고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다시 표지의 사진을 바라보는 지금은 처음과는 달리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길 끝을 응시하게 된다. 그 안개 속으로 사라진 듯한 한 남자를 추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