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밤으로의 긴 여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무적이 울려대는, 한치 앞을 가려볼 수 없는 안개 속에 별장 하나가 우두커니 놓여있다. 겉으로 보기엔 어느 시골에나 있을 법한 평범하고 조용한 별장이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보면 집안 곳곳에 긴장과 불안과 절망의 냄새가 가득 배여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안개와 무적소리는 이미 집안 깊숙이 침투해있다. 탁자 위의 위스키병과 책장에 꽂힌 쇼펜하우어와 니체, 보들레르 등의 서적들이 집안의 음울한 분위기를 암시하는 가운데 메리는 굽은 손가락을 쉴새없이 까딱거린다. 그녀의 남편 티론, 두 아들 제이미와 에드먼드는 그녀를 불안한 표정으로 관찰한다.
이 『밤으로의 긴 여로』는 티론 가족이 아침으로부터 밤으로 흘러가는 하루동안의 이야기이자, 저자 유진 오닐의 과거 이야기이다.
티론 가족들은 모두 조금씩 비정상적이다. 요양소에서 나온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모르핀을 맞기 시작한 메리, 가족에 대해 지나칠 만큼 인색한 티론, 술주정뱅이 큰 아들 제이미, 폐병에 걸려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대는 작은 아들 에드먼드. 이들은 각자 자신의 치부를 부인한 채 서로의 상처를 할퀴고 비난하기에 바쁘다. 아주 잠깐씩 모든 것의 탓을 운명으로 돌리며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곧 다시 말다툼이 시작되고 해가 저물어갈수록 그 고도는 더해간다. 그들의 신랄한 어조와 고함섞인 비난은 굳이 무대에 올리지 않고 극본 자체로만 봐도 절실하게 느껴진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극중 메리는 말한다.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현실을 외면한 채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건 어떻게 보면 무책임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하게 흘러가는 시간 앞에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운명을 탓하지 않고서 어찌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메리의 대사는 오닐이 그의 가족에 대해 보내는 연민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오닐은 그들을 이해하려 애썼고 그래서 이 작품을 썼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오닐은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당신,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바치오."
그는 이 작품을 쓰며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눈이 벌겋게 부은 상태로 작업실에서 나오곤 했다는 그의 부인의 회고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대변해준다. 실로 그에게 너무도 힘든 작품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그의 사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그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다룬 이 작품을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 발표하지 말 것이며 그 이후에도 절대로 무대에 올려서도 안 된다고 부탁했다. 허나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고 그에게 4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줬으며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오닐이 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티론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의 상처를 들추어내지만 그들의 마음 속 깊이엔 가족들을 향한 애정과 연민을 품고 있는게 느껴진다. 아마도 오닐이 피와 눈물로써 그들을 이해하고 이 작품을 썼기 때문이 아닐런지. 읽는 동안 문득문득 내 가족이 떠올라 쉽게 읽어내릴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나는 아마도 이 작품과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