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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퀘이크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다 보면, 특히 소설을 읽다 보면 가끔씩 내가 왜 이제서야 이렇게 재밌는 작가를 알게 됐지?,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중 대표적인 두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커트 보네거트다. 두 사람이 각각 오십대와 팔십대가 되고 나서야 나는 그들을 알게 되었다. 참, 늦기도 하지. 하긴 내 나이상 좀 더 일찍 알았더라도 별반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서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알려지다시피 하루키는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암튼, 나로선 감사할 따름이다.
오랜만에 찾아간 도서관에서 유달리 말끔한 모습으로 꽂혀있는 이 책을 발견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책이 공식적인 그의 마지막 작품이란다. 아뿔싸. 마치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난 아직 그를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지막이라니. 그 유명한 <제5도살장>도 접하기 전이다. 그래도 어쩌나. 이미 호기심이 의지를 넘어서버렸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책은 그의 회고록이었다. 물론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자전적 요소가 짙게 배인 이 작품을 달리 뭐라고 부를 것인가. 작가는 킬고어 트라우트라는 분신을 내세워 타임퀘이크라는 기발한 장치를 이용해 자신의 과거를 끄집어낸다. 타임퀘이크. 하나님의 근육에 일어난 우주적 경련으로 우주는 자기 확신의 위기를 겪고 10년의 시간을 수축해버린다. 그리하여 이 책의 모든 가공인물들은 10년 전으로 되돌아가 1991년부터 2001년에 내닫는 길을 다시 걸어가야만 하게 되었다. 바로 기지감! 그것을 느끼며 말이다.
세상은 무대이고, 인간은 배우일 뿐이다. 이 말은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다. 트라우트는 무대 연극을 '인공 타임퀘이크'라 부른다. 작가는 말한다. "다음번에 타임퀘이크가 일어나면 반복기 첫머리에 이 말을 잊지 말라. 연극은 계속되어야 한다!" (39p) 결국 인간들은 10년간 연극을 하게 된 셈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밝혀낸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지인들에 대한 얘기도 한다. 자신이 참전한 제2차 세계 대전, 그의 말대로는 서구 문명의 두 번째 자살 기도에 대해서도, 그가 쓴 작품들의 뒷이야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물론 그 특유의 농담처럼. 잘 모르고 보면 상당히 산만하다. 나 역시도 초반에선 이게 뭔가 하는 맘으로 헤매다 중반에 가서야 적응을 하게 되었으니.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을 접하다 보면 곧 그의 코드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반전, 냉소, 블랙유머, SF, 비참함, 그러나 경쾌함. 경쾌하게 구슬픈 그의 농담이 그의 작품을 이룬다. 실컷 웃다가 마지막에 가서 묘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게 그의 작품이다. 살아 있음이 곧 똥 무더기라고 말하면서 고양이도 끌고 들어오지 않을 물건 같은 비참함을 느끼게 하면서 우리가 지상에 온 건 빈둥거리며 지내자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가 종반엔 하늘의 빛점과 빛점 사이의 까마득한 거리를 빛의 속도보다 백만 배나 더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요, 영혼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어찌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타임퀘이크 후 무감각 증후군에 빠진 전세계에 그의 분신 킬고어 트라우트가 던진, "당신은 아팠지만 이제 나았고, 해야할 일이 있다"는 만트라는?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그의 작품을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