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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2003년 제3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안개 속의 성처럼 내면에 희뿌연 존재를 드리운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존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웹 서핑을 하다가 무심코 흘러나온 음악에서, 이른 아침의 맵싸한 공기 속에서, 저녁 무렵의 주택가에서 풍기는 찌개나 생선 조림 따위의 냄새에서, 이따금 나는 아련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그럴 때면, 안개 속에서 길을 더듬거리며 걷다가 들려온 음악 소리에 이끌려 성에 당도하듯, 아득한 기억의 파편과 마주하게 된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금세 어린 아이가 되곤 하는 것이다.
그 어린 아이가 금방 꺼낸 카스테라를 손에 얹은 듯 따뜻함이 느껴지는 책을 만났다. 제목부터 몸의 긴장을 스르르 풀리게 만드는 책이다. 김연수의 책은 이 책으로 두 번째다. 그의 작품들은 시를 써서 등단한 작가답게 문장이 쉽게 읽히지 않았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고 했던 작가. 그의 말이 아직은 알 듯 모를 듯하기만 한, 스무 살 이후가 되어 나는 이 책을 통해 지난 이십여 년 간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보는 계기를 얻었다.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던 지난날의 기억처럼 이 책 역시 작가의 그런 과거를 재현시켜 놓았다.
-서른이 넘어가면 누구나 그때까지도 자기 안에 남은 불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게 마련이고 어디서 그런 불빛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한때나마 자신을 밝혀줬던 그 불빛이 과연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79페이지)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불빛들을 꺼내 올린 듯 이 소설집엔 다양한 불빛들이 드리워져 있다. 천애지각을 뒤덮은 하얀빛(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 가을날 오후의 노란빛(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부서지고 녹아내려 떨어져나간 자잘한 빛(뉴욕제과점),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노란 물결, 나비 모양의 금빛 먼지(첫사랑), 보름달 마냥 밝게 하늘에 내걸린 노란 연등(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제각기 다른 빛을 흔드는 등나무 잎(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등등. 그 빛 앞에서 소년은 눈물을 흘리고 첫사랑에 빠지고 빛과 빛 사이 오가는 생각을 되짚는다.
어른이 된 작가는 그 불빛들을 꺼내보며 그 불빛 중심에 선 공간들을 추억한다. 게이코가 있던 빵집, 학교, 뉴욕제과점, 평화시장, 리기다소나무 숲, 평화동 80번지. 그곳들의 중심축엔 뉴욕제과점이 있다. 연필로 써내려간 이 짧은 소설에서 작가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뉴욕제과점이 만들어준 추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뉴욕제과점’과 비슷한 존재가 하나 둘쯤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든, 둘이든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는 사라졌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있는 존재, 그리고 그 존재로부터 우리가 살아갈 자양분을 얻을 수만 있다면 되는 것일 테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라는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