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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다섯 번의 자살 기도. 결국 다섯 번째 자살 기도에 성공하여 서른 아홉 해의 짧은 생 마감.
이 책을 읽기 전 저자 소개글에서 본 이 사실은 충분히 흥미를 끌어냈다. 더군다나 이 책 제목도 '인간 실격'이라니. 뭔가 어두침침하고 담배와 마약 냄새가 풍기는 분위기다. 다섯 번이나 자살 기도를 할 만큼 그는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왜 하필 그의 말기에 쓴 이 책의 제목이 인간 '실격'인가, 하는 궁금증에 이 책을 펼쳐들었다.
-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p.17
만약 평생을 연극을 하며 살아야 한다면 과연 그 고통은 얼마나 깊을까. 어린 나이에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을 알아버린 나약한 소년.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 그들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리만큼 익살을 부리는 것 뿐이었다. 웃고 있는 슬픈 삐에로가 바로 그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속내를 간파당하는 것. 지옥과도 같은 그 순간을 느끼게 한 인물, 다케이치로부터 그는 두 가지 예언을 듣는다. 하나는 '여자들이 반할 거야'라는 저주와 같은 예언, 또 하나는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라는 축복 같은 예언. 안타깝게도 저주는 이루어지고 축복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파멸의 길을 걷는 데 일조했다.
자살이나 일삼는 낙오자, 알코올 중독자, 모르핀 중독자, 삼류 만화가에 책임감도 분노도 거절도 모르는 인간. 스물 일곱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남자. 인간 실격자. 그는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인간 실격자라고.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대신 스스로의 자격을 박탈시켜 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는 결벽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너무도 깨끗해서 조금이라도 더럽혀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일찍이 깨달아버린 인간의 이중성. 카멜레온처럼 시시때때로 변하는 인간의 교활한 속성. 소가 느긋하게 잠을 자다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는 무시무시한 노여움. 그는 그 모든 것에 공포를 느꼈고 결국 융합되지 못한 채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투쟁을 싫어했다. 싸우기 보다 오히려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 생채기를 내고 아픔을 호소했다. 그러니 세상이 그를 정신이상자로 보며 격리시킬 수밖에.
이렇듯 이 책은 한 인간이 파멸의 길을 걷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파멸,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리고 스스로를 인간 실격자라고 내뱉는 인간은? 그가 이해가 되는가? 솔직히 말하건대 난 그가 어느정도는 이해가 된다.
오늘도 나는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눈치를 키우고 변신을 한다. 사회라는 이 현실 세계와 내가 생각하는 이상 세계에 양다리를 걸치고 갈팡질팡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고 있다. 아마 사회에 나가면 나 역시도 능수능란한 카멜레온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삐에로의 슬픈 눈이 떠올라 현실을 견디기 힘들게 할 것일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