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꼬치의 기쁨
남유하 저자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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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하의 소설은 현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었던 공포, 기묘한 감정, 펼치지 못해 억눌렸던 욕망 등이 남유하의 소설에선 적극적으로, 때론 통쾌하게 카타르시스를 자아내며 악몽처럼 펼쳐진다. <양꼬치의 기쁨>을 마냥 괴이소설로 읽고 웃어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 소개란에 남유하는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글을 쓴다고 소개되어 있다. 각 단편은 귀신, 타임리프, 외계인의 출현 등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의 나열이지만 그녀의 소설은 결코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상상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현실이 입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열 개의 단편 (<기억의 꿈>과 <내 이름은 제니>는 연장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나로 봐도 무방하다) 속에는 우리가 모두 약자라는 자리에서 한 번쯤 느껴봤던 불편함과 억압된 분노가 녹아 있다.




여성의 결혼


남편은 어머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밥을 먹으라고 했을 뿐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다며 화를 냈다.

 -<닫혀 있는 방> 중

"당신은 항상 혼자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죠.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데 말이에요. 그래서 너무 당연한 건데도 간과할 때가 많더라구요.

 -<뒤로 가는 사람들> 중


결혼의 베일이 벗겨지고 친절과 배려로 가장한 위선과 이기심을 발견했을 때 보통 우리는 어떻게 했던가. 차라리 고통을 잊기 위해 자신의 처지를 순응하거나, 잘못된 결혼을 선택한 자신의 근시안을 탓하고 견디며 살거나, 혹은 최후의 수단으로 갈라서기를 선택하거나.


과거에 비해 여성의 권한이 확대되었고, 따라서 여성의 억압이 더 이상 현실이 아니라 생각하는 이들도 존재하리라. 하지만 <닫혀 있는 방>을 읽어보자. 결혼한 남녀로 독립된 공간을 원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예민하게 군다'며 핀잔을 준다. 게다가 어머니의 '밥 먹으라'는 친절을 악의로 받아들이는 못된 여자 취급한다. 둘이 새 집을 구하고 겪는 기괴한 일들 ─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 신경을 거스르는 악취 등 ─ 은 욕심을 낸 아내의 탓으로 돌아간다.


<뒤로 가는 사람들>의 남편은 집에서는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리프'를 이용해 자신이 아내를 살해한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그리고 "이제 당신하고 행복하게 잘 살려고" 했다고 말한다.


남유하는 이런 식의 자기변명을 허용하지 않는다.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남유하의 소설 속 인물들은 '참지 않는다.' 그녀들은 행동한다.


비록 상상 속의 승리이더라도, 남유하의 여성들은 복수한다. 나는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야 한다면 '침묵하던 자들의 복수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복수극이라는 표현이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악몽이 결국 혈투 끝 승리로 보여지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남편 양꼬치라는 거죠?

아내가 물었다.

 -<양꼬치의 기쁨> 중




여성의 외모


'여자라면.' 이 수식어가 여성을 얼마나 억압해 왔는지 가장 잘 드러내주는 단편은 단연 <내 이름은 제니>이다.


여성의 억압은 때론 같은 여성에게서 파생되기도 한다. 구관습을 답습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살아온 대로 '여성성'이 여성의 정체성과 가치를 결정 짓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들은 ─ 같은 여성이면서 권력층을 기꺼이 대변함으로써 여성혐오의 계승을 이어나가는 이들  여성의 제한적인 지위와 역할을 유지시키는 데 중요하고 실질적인 역할을 한다.


애프터를 못 받은 진짜 이유?

아마도 그들이 '인형'을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아래 뇌라고는 들어 있지 않은, 바비 인형 같은 여자(남자들은 그런 여자가 실제로 있을 거라고 믿는 걸까?).

 -<내 이름은 제니> 중

엄마가 절대 늦게까지 있지 말라고,

처음 만난 남자와 열 시를 넘기면 '싸구려' 같다고 했는데.

 -<내 이름은 제니> 중


이렇게 변두리로 밀려난 여성들은 또 다른 남성들의 표적이 된다. 제니의 경우를 보자. 제니는 자신이 엄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남자의 작은 친절에 쉽게 매료되며 그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한다.


결국 남자가 버리고 간 제니를 다시 주워오는 건 다른 남자이다. 단순히 '여자'가 필요했던 남자. 하지만 그 또한 쓸모가 다 하자 제니를 사창가에 팔아 버린다. 제니는 언제 '제니'로 존재할 수 있을까? 제니는 '여성'이라는 성별로만 가치를 부여받는 인물인가?


<내 이름은 제니>와 결을 달리 하지만 <흉터>는 어떠한가.


아영이는 얼굴의 흉터로 비가시적인 '다른 취급'을 받았다. 언니는 언제든 품에 안고 있지만 아영이에게는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이유로 한 번도 제대로 안아준 적 없던 엄마, 화를 내지도 핀잔을 주지도 않는 엄마, 흉터가 옮을까봐 슬금슬금 도망갔다고 하는 반 아이들.


우리가 배려한다고, 조심한다고 차별하는 존재들은 우리의 배려를 어떤 식으로 느끼고 받아들일까. 우리의 친절과 배려는 결국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자기위선일지도 모른다.




존재의 상실


그렇다고 남유하의 소설을 단순한 여성주의 소설로만 보는 것은 이 소설의 입체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매 챕터마다 전율을 느끼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단연 <초신당>과 <상실형>이었는데 전자는 마치 <곡성>과 같은 영화를 보는 것 같았고 후자는 범죄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이 '있을 법하지만 있지 않은' 일이기에 그랬다.


상실형은 죄인의 신체 일부를 '상실'하도록 하는 형벌로, 살인이나 강간. 방화 등 중죄를 저지른 피고에게 선고된다. 상실형은 죄질에 따라 1에서 10 단계로 구형되었다. 

 -<상실형> 중


김의 범죄의 진위여부는 밝혀지지 않지만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것의 감각을 느끼고 그 잔혹성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초신당>의 구절을 인용하자면 "돌아갈 일상이 없"는 삶의 공포를 함께 느껴본다.




일상의 파괴


남유하 작가는 말한다. 진짜 공포는 이제껏 참아 왔던 이들이 더는 침묵하지 않고 일어설 때 펼쳐질 것이라고.

 -<추천의 말> 박현주


남유하의 글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는가? 그렇다면 그녀의 통렬한 고발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서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가 대변하는 사람들 ─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 외모에 강박을 가진 소녀 등 여성이 대부분이다 ─ 이 일상에서 겪는 일이 껄끄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에겐 일상으로 이상할 것 없이 넘어갔던 날들이 누군가에겐 공포이자 악몽이었다는 것. 따라서 침묵이 깨어질 때 우리들의 일상은 함께 파괴된다. 하지만 <추천의 말>에서 소설가(번역가) 박현주가 말했듯 침묵의 중단과 일상의 고발이라는 이 공포에는 "승리감도 함께한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 아직 침묵 속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함께 이 오싹함의 전율을 느껴보자고 초대의 손을 내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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