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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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모성애

 

 

 

  가족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접하는 사회 구성집단이다. 한 인간에게 가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든든한 구성원으로서 힘이 될 수도 있고,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어 지독하게 삶을 괴롭힐 수도 있다. 따라서 가족에 대한 물음은 '나'를 돌아보면서 '나'에 대한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가족, 엄마와 아빠. 형 혹은 누나, 또는 여동생 혹은 남동생. 화목한 가족은 소박하지만 이루기 어려운 꿈이다. 가족에 대한 가치관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노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쉬워보이지만 그 어떤 문제보다 복잡하고 근본을 파악하기 힘든 문제이다. 흔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가족이라는 구성원. 그 구성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식을 많이 낳을 예정이었다. 두 사람은 미래에 대해 엄청난 포부를 갖고 있었기에 약간 도전적으로 「우리는 애가 많아도 개의치 않아요」라고 선언했다. 「넷도 좋지, 아니 다섯도……」, 「아니 여섯도」라고 데이비드는 말했다. 「그래, 여섯!」 안도감에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어대며 해리엇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침대 위에서 웃고 뒹굴면서 키스했고 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p14)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와 같이 보면 좋은 책이다. 크게는 가족에 대하여, 작게는 모성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 흔히들, 모성애는 여자라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심지어 가지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건, 충분한 조건을 가진 사람만 가능하다. 어쩌면 나도 모성애가 없을지도 모른다(그래서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모성애는 '가져야지'라고 생각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도 인간이다.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줄 수 있다. 물론, 엄마이기 때문에 먼저 사랑을 줄 수 있지만, 자신이 준 사랑이 아이에게 부정적으로 작용되는 순간.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낙담을 할 수 있다. '엄마'라는 짐은 무겁고 책임은 엄청나기에 아이를 쉽게 버릴 수 없다. 해리엇이 다시 벤을 끔찍한 병원에서 데리고 오는 이유도 '엄마'이기 때문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모성애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일어나는 불안정한 모든 일들은 벤(영화에서는 케빈)때문이다. 의사는 아이가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아이에 대한 의심은 쉽게 버릴 수 없다.

  해리엇(엄마)의 시선에서 보면 아이(벤)은 상당히 문제가 많다.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엄청난 식탐(慾)과 난폭한 성질은 그녀가 감당하기 힘들다. 심지어 해리엇의 가족들은 매우 비협조적이다. 커다란 저택에서 함께 아름다운 가정을 꿈 꾼 데이비드 마저도, 가정의 생계를 물질적으로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와 점점 멀어졌다. 해리엇의 가정은 그녀가 꿈꾸었던 가정과 전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녀는 작은 희망도 놓치지 않으려고 병원을 찾아간다. 의사는 어린 벤이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를 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심지어 다른 의사는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해리엇은 믿지 않았다. 아무도 벤과 해리엇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고, 벤을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해리엇은 벤이 좋아한다는 이유하나만으로(그래야 자신이 편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짓을 저질러도 가만히 두었다. 성장한 벤은 정말로 괴물이 되어버렸다. 벤이 괴물이 된 이유는 해리엇(과 그녀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 때문이다. 그 누구도 벤의 이야기를 끈기있게 들어주지 않았다. 벤의 포악적인 성질 때문에 외면하고 서로 떠맡기를 거부했다. 만약, 해리엇이 의사의 말을 믿었더라면. 가족들에게 적극적으로 벤과 함께 살기 위해 노력을 해달라고 요청했더라면.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 필요가 있었을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만약'보다 잔혹하고 쓸데없는 단어는 없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거기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계속 말했다……. 하지만 해리엇으로서는 어떻게 안 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녀가 가지 않았더라면 데이비드가 갔을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희생양. 그녀는 희생양이었다 ― 해리엇, 가정의 파괴자.

  그러나 또다른 생각과 감정의 층이 저변에 깔렸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하였다. 「우린 벌 받는 거야. 그 뿐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p158~9) 

​   모성애가 가족의 만능 열쇠는 아니다. 가족은 저절로 만들어지고, 저절로 꾸러가지는 것이 아니다. 가족 또한 하나의 사회이고,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 해야한다. 그렇기 떄문에 가족을 잘 구성하는 것도 엄청난 일이다. 가족을 구성하기 전에, 가족의 중심이 될 부부가 충분한 의논을 해야한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처럼, 이상이 맞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가족을 꾸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서로를 택할 수 없다. 하지만 서로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끈이 있다. 그 끈은 서로를 놓아줄 수 없는 족쇄가 될 수도, 서로를 묶어주는 튼튼한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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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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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함이 있는 곳
  이 책을 좋아하는 선배가 한 명 있다. 그 선배는 이 책을 극찬했다. 선배가 쓰는 소설 뿐만 아니라 선배의 인생도 위대한 개츠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선배의 소설은 이야기를 꾸려가는 힘의 맥락에서 꽤 닮고 싶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난 이 책을 읽으려고 벼르었다. 이 책을 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위대한 개츠비> 영화가 개봉을 하였고 개츠비 붐이 일어났다. 책을 읽든 읽지 않든 책과 관련된 사람과 관련된 곳에서 개츠비를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었다. 나에게는 그 환호가 가식 같았다. 동요되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핑계거리가 만들어지고 이 책을 외면하고 있었다. 마지막 여름방학이 시작 되고 집에서 하릴없이 뒹굴거리며 도서관에서 잔뜩 빌린 책들 속에서 예전에 샀던 개츠비가 떠올랐다. 일찍이 본 영화의 여운 때문인지, 개츠비를 좋아하는 선배가 떠올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을 펼쳤다. 몇 번 읽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1장 초반을 지나자 책은 순식간에 읽혀졌다. 인물의 동선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세계 1차대전을 지나고 대공황을 앞두고 있는 화려한 뉴욕, 물질만능주의가 최고로 꽃을 피웠던 시기, 그 한가운데에 놓여진 사람들. 그들의 관계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개츠비는 위대했다.
  위대, 순수한 의미로 위대했다고 할 수도 있고 반어적인 의미로 위대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개츠비는 물질이 넘쳐흐르는 곳에서 자신만의 순정을 끝까지 지켜내었다. 그 모습이 바보같고 답답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외골수적인 면모가 그를 위대하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개츠비의 아이러니가 발견된다. 사실 정확한 개츠비는 알 수 없다. 그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없다. 책 속에 파도처럼 몰려나왔던 인물들은 개츠비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품어내고 있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개츠비의 면모가 드러나지만 왠지 이것도 확실치 않을 것 같다는, 의문이 떨쳐지지 않는다.
   빵빵대는 클랙슨 소리는 크레셴도로 커져만 가고, 나는 몸을 돌려 잔디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나는 뒤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웨이퍼 과자 같은 달이 개츠비 저택을 비추고 있었다. 달빛은 아직 훤한 개츠비네 정원의 소음과 웃음소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밤을 밝히고 있었다. 갑자기 창문과 커다란 문으로부터 공허함이 넘쳐나, 포치에 선 채 정중히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집주인의 실루엣에 완벽한 고독을 더했다. (p74)
  닉은 개츠비의 관찰자이다. 개츠비의 근처에서 화려한 삶과 고독한 삶을 보고 그를 기록으로 남겼다. 미국의 경제 대호황은 작품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이면을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배경, 그 배경 속에서 살았던 작가는 위대한 개츠비를 만들어내면서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F.스콧 피츠제럴드도 만만찮은 삶을 살았다. 쉽지 않은 사랑과 사랑을 위해 살았던 작가와 개츠비는 많이 닮아있다. 어쩌면 작가는 과시하면서도 위로를 받고 싶은게 아니었을까. 쓸쓸함이 많이 묻어났던 소설이었다. 위대하지만, 위대함보다도 못한. 그러나 위대한. 단어 자체만으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제법 멀어보이지만, 알고보면 위대함은 꿋꿋이 한 길을 걸은 사람 누구에게나 존재할 것이다. 사랑의 길을 걸었던 개츠비의 마지막이 행복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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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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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소설 속에 들어가는 초콜릿

 

  제목부터 맛있는 이 소설은 소설까지 먹음직스러웠고 맛있었다. 부엌이라는 공간을 끌고와 티타의 사랑과 상황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놓았다. 역시 소설에는 금기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막내 딸은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보살펴야 한다는 집안 전통에 따라 티타는 사랑하는 남자 페드로를 첫째 언니에게 빼앗겨야만했다. 이 소설이 아주 흥미로운 점은 어머니도 자신만의 금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만든 틀 아래에서 구축해놓은 안전을 위해서 어머니는 얼마나 노력했을까. 이 소설에서 불쌍한 사람은 죽어서도 집안에 매여 있어야만 했던 마마 엘레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마 엘레나는 금기를 깸으로써 남편을 죽게 했지만 또다른 금기가 생겨버렸다. 막내딸에게 금기를 만들기도 했다. 금기. 이 소설의 힘은 처음부터 끝까지 금기였고, 금기는 이 소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설에 존재한다. 금기의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그리스로마신화가 있다. 그때부터 인간은 금기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깨려고도 노력했고 혹은 자신도 모르게 금기를 깨기도 했다. 금기는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용기가 없다면 한없이 목을 죄어 온다. 티타는 행동할 용기가 없었고 페드로는 용기를 내기는 커녕 상황을 외면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은 불행했다. 그렇다면 금기를 깨고 두 사람은 행복했을까?

  글쎄, 선뜻 답을 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졌지만 행복해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상황마저 불행해보였다. 존이라는 인물을 잊기 어려워서 그랬던 건 아닐까. 존은 매우 멋진 남자였다. 현실에서 이런 남자가 있다면 가로채가고 싶을만큼. 성냥을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존과 티타는 가까워졌다. 이제와서보니 존은 티타를 가질 수 없는 남자였다. 존은 금기를 깨기 위해 노력했고 그 금기를 깬 티타가 괴로워할 때, 옆에서 도와주었다. 성냥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인디언 출신이었던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곁들였다(이 소설 독후감엔 이렇게 써야 할 것 같다). 이때, 티타는 조금씩 더 큰 금기(언니의 남편, 페드로와의 사랑 결실)를 깰 수 있는 작은 불씨를 얻었던 것이 아닐까. 그 불씨가 타오르고 타오르면서 끝내는 페드로를 먼저 보내는 상황까지 이르렀던 것은 아닐까. 페드로가 탈 때 티타가 같이 타지 않고 자신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존 때문은 아니었을까. 의문이 계속해서 생긴다. 그만큼 티타의 이야기는 매력적이었다.

  멕시코 음식을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소설을 읽는 순간만큼은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 아몬드와 참깨를 넣은 칠면조 몰레, 크림튀김, 호두 소스를 끼얹은 칠레고추 요리를 먹은 것 같았다. 그만큼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매우 자세하게 쓰여있다. 처음에는 이 과정이 왜 쓰였나 싶지만 읽다보면 먹는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서 적게는 몇 시간 많게는 며칠씩 준비해야 하는 요리를 읽으면서 경건해지기도 하고 티타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소설 속 음식을 먹은 사람처럼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는 매 월 매 요리마다 달랐다. 요리는 금기를 깰 수 없는 티타가 마녀처럼 사람들에게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도구였다. 도구는 많은 사람, 심지어 눈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까지 매혹시켰다.

  6월의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6월 파트에서 존이 티타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악이나,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중략)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p124~125)' 다행히도 축축해지기 전 나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찾아냈다. 다른 사람의 불씨는 어떤 형태로 존재할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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