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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첫인상은 우리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인간은 원래 어떤 신기한 일이라도 쉽게 곧이듣게끔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일단 곧이듣고 믿게 되기만 하면 단단히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을 다시 지우거나 말소시키려고 한다는 것은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85 p
아아, 내 가슴은 너무나 들끓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납득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 84p
확실히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와, 그리고 우리를 모든 것과 비교해 보도록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행불행은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대상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독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문학의 환상적인 이미지에 영향받은 우리의 상상력에는 본질적으로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충동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피조물을 한층 고양시킨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이게 되어 우리 이외의 것은 모두 우리보다 훌륭하고 누구 할 것 없이 우리보다는 완전해 보인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여러가지 있다고 우리는 느낀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그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이상적인 삶의 즐거움마저도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행복한 사람이 한 명 완성되는 것인데, 이처럼 완벽하게 이룩된 사람이란 사실은 우리 스스로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 104p
무슨 연유에서인지 나는 이 책을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에 선물 받았다. 막상 책을 읽은 것은 중학생이 되던 해였는데, 그 시절 내 기억 속 잔상이란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나'가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안타까운 집념은,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명치 끝이 살살 간지러워져 깔깔 거리던 14살 소녀에게는 너무 벅찬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실은 나는 여전히 '사랑'이라는 단어가 낯설다. 심지어 어릴 땐 '사랑'이 뭐냐며 진지하게 반문한 적도 있었다.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의 차이가 무엇일까? 너무너무 좋으면 그것이 사랑인건가 하며 아직도 나는 '그 것' 의 정의에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생각하는 희대의 집착남, 그 양대 산맥을 꼽자면 다름아닌 베르테르와 히스클리프 (에밀리 브론테 作 폭풍의 언덕)가 되겠다. 실은 이 둘이 이렇게 광적인 사랑을 하게 된 데는 이 비극적 드라마의 히로인이자 조련사였던 로테와 캐서린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 받아주면서도, 정작 다 받아주지 않는 그녀들의 비정한 희망 고문이 있었기에 그들의 타이틀이 이렇게 굳건히 지켜질 수 있었으리라.
책 속 내용은 간단하다. 집안 상속건을 처리하러 왔던 법학도 베르테르가 우연히 로테를 알게되어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 괴로워 먼 나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로테가 알베르트와 결혼한 사실을 편지를 통해 알게 되자 베르테르는 오히려 더욱 그녀를 잊을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그 그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되돌아 온다. 그야 베르테르의 극적인 선택을 오롯이 로테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열정과 이상이 있던 '젊은 베르테르'는 해묵은 관료사회에 염증이 나있었고 이제껏 직접적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던 로테가 (실은 자신의 자책감 때문에) 황급히 자리를 피해 버렸던 사건이 불꽃 같던 그의 성격에 도화선을 그었을 수도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다른 사람의 짝사랑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내 짝사랑은 그리 아름답지도, 절절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저 길고 긴 외로움의 반추일 뿐.
그의 뒷 모습에 눈물이 난다던 서영은의 노래처럼, 나 역시도 그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났었다.
나는 열 다섯살부터 열 아홉살까지. 길고 지긋한 짝사랑을 끝내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닐 것에 도전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또 열병 같은 첫사랑이 지나갔고, 만남보다 더 긴 후유증을 앓았다.
그렇게 짝사랑도, 첫사랑도 지나 버린 지금에서야 다시 마주보게 된 베르테르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는 내 또래가 되어버린 베르테르. 그래도 나도 아직은 청춘이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그가 그렇게 고뇌하던 모든 것들이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왔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너 아니면 죽을 것만 같던 그 시간들 역시 결국엔 다 지나가버린다. 어쩐지 잔인해보이는 말이지만, 상처란 치유가 되기 때문에 또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 자체를 순간의 치기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
-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일생 시니컬하게 살 것 같은 비평가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역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니, 인간은 좋으나 싫으나 마음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운명인가보다.
아 찬 바람이 쌀쌀한데, 나도 하고 싶다. 남들 다 하는 그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