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1월 1주

이 시대에 전화는 문명의 상징이자 소통의 도구로 확실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씨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를 연재하면서 다른 문명 도구들을 철저히 배제하였지만 전화만은 인간 간의 소통의 도구로 그 역할을 잘 그려내었다. 직접 마주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문자 하나 메일 한 통 보다 그리운 것은 역시 사람의 목소리이다. 목소리는 비단 음성 그 자체만은 아니기에 사람들은 늘 전화벨 소리에 목말라 하는 것은 아닐까.

그저 코믹드라마라고만 생각하고 보게 된 불량남녀는 서로의 전화를 끊임없이 울려댄다는 점에서 위의 소설을 생각나게 했다. 사실 소설의 제목은 최승자 시인의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영화는 시의 원제와 썩 잘 어울린다. 그렇지만 막상 소설의 제목이 생각나니 소설의 여운이 곧 샘솟았고, 그래서 그저 웃으면서 집중하지는 못했다. 물론 이 영화와 소설은 전화가 주인공들 사이의 주요 도구로 등장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작가와 감독이 전화의 중요성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나도 다시금 전화기, 그 때로는 너무 잔인한 무기가 되고, 때로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이중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의 등장 인물 간의 관계 변화도는 또한 엽기적인 그녀와 내 깡패 같은 애인을 생각나게 했다. 원수 혹은 남남이 애인 사이로 변하게 된다는 설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량남녀 엔딩 장면의 택시 호출기를 사용한 대화와 엽기적인 그녀에서 지하철 방송 마이크를 사용한 대화가 비슷한 절정을 도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정말 영화와 같은 장면들 때문에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몰입하게 되는데, 이런 극적인 순간들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미움과 불만으로 시작된 관계가 애인으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내 깡패 같은 애인을 생각나게 하였고.  

또 곰곰히 생각해 보니 세 편의 영화 남녀 구도에서 여자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2001년 엽기적인 그녀의 등장은 여인천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는데, 그 후로 여성전성시대를 방불케 한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전의 순종적이고 정말 멍청하다시피까지 한 여성성에서 진화된 것은 이해하겠는데, 좀 '엽기적인' 것으로 그 변화 양상이 획일적이 되는 것은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최강희와 같은 '사차원' 같은 캐릭터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각설하고, 불량남녀의 사랑 고백을 본 주위 사람들이 서로의 전화기를 꺼내 들고 그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것처럼,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서로의 전화기를 울려 줄 누군가에게 연락해 본다면 좋을 것 같다. 참고로 내 전화기는 바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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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전화는 문명의 상징이자 소통의 도구로 확실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씨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를 연재하면서 다른 문명 도구들을 철저히 배제하였지만 전화만은 인간 간의 소통의 도구로 그 역할을 잘 그려내었다. 직접 마주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문자 하나 메일 한 통 보다 그리운 것은 역시 사람의 목소리이다. 목소리는 비단 음성 그 자체만은 아니기에 사람들은 늘 전화벨 소리에 목말라 하는 것은 아닐까.

그저 코믹드라마라고만 생각하고 보게 된 불량남녀는 서로의 전화를 끊임없이 울려댄다는 점에서 위의 소설을 생각나게 했다. 사실 소설의 제목은 최승자 시인의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영화는 시의 원제와 썩 잘 어울린다. 그렇지만 막상 소설의 제목이 생각나니 소설의 여운이 곧 샘솟았고, 그래서 그저 웃으면서 집중하지는 못했다. 물론 이 영화와 소설은 전화가 주인공들 사이의 주요 도구로 등장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작가와 감독이 전화의 중요성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나도 다시금 전화기, 그 때로는 너무 잔인한 무기가 되고, 때로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이중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의 등장 인물 간의 관계 변화도는 또한 엽기적인 그녀와 내 깡패 같은 애인을 생각나게 했다. 원수 혹은 남남이 애인 사이로 변하게 된다는 설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량남녀 엔딩 장면의 택시 호출기를 사용한 대화와 엽기적인 그녀에서 지하철 방송 마이크를 사용한 대화가 비슷한 절정을 도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정말 영화와 같은 장면들 때문에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몰입하게 되는데, 이런 극적인 순간들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미움과 불만으로 시작된 관계가 애인으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내 깡패 같은 애인을 생각나게 하였고.  

또 곰곰히 생각해 보니 세 편의 영화 남녀 구도에서 여자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2001년 엽기적인 그녀의 등장은 여인천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는데, 그 후로 여성전성시대를 방불케 한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전의 순종적이고 정말 멍청하다시피까지 한 여성성에서 진화된 것은 이해하겠는데, 좀 '엽기적인' 것으로 그 변화 양상이 획일적이 되는 것은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최강희와 같은 '사차원' 같은 캐릭터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각설하고, 불량남녀의 사랑 고백을 본 주위 사람들이 서로의 전화기를 꺼내 들고 그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것처럼,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서로의 전화기를 울려 줄 누군가에게 연락해 본다면 좋을 것 같다. 참고로 내 전화기는 바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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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엑스아티움에서 하는 줄 알고 갔다가 아니라서 깜놀하고, 코엑스 2층 아트홀로 다시 가서 무사히 보고 왔다. 너무나 유쾌한! 연극 일 줄 알고 예매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진지하고 웃음 코드도 너무 시시하거나, 아님 어려워서 나의 지금 처지(?)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생겼다.  

주요 등장인물은 단 두 명, 일본인 극작가와 연극 검열관이다. 검열관은 일본이 지금 전시 상황이니만큼 사기를 드높이는 내용으로 각색할 것을 요구하고, 극작가는 어려운 시기인 만큼 항상 웃음을 선사해야 된다고 말한다. 검열관은 웃기지 않는 희극을 쓰라 하고, 극작가는 말이 안 되는 말을 자꾸 글로 쓰는데, 이건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는 것 같았다. 뭐 4대강을 살려야 하니 보 공사를 하자는 것과,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번에 행해진 인사권을 강행하는 정도?  

검열관은 계속 자기 이야기만 하고, 극작가 역시 자기 주장을 펴는데, 어느 순간 검열관과 극작가가 서로 통하고 인정하게 된다. 그 순간 7월에 참관했던 김두식 교수님의 강연회가 생각났다. 교수님은 본인이 아무리 강연회를 열고, 책을 내더라도 자기를 찾아 오는 사람은 늘 '같은 편'인 사람 뿐이라고 한탄하셨다. 같은 편인 사람들을 상대로만 이야기를 하니, 결국은 뭔가를 하는 것 같아도 변화는 없다고 씁쓸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물론 같은 편끼리 연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는 것,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연극도 마찬가지로 그 '소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그래서 며칠을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옥신각신 하던 두 사람이 마지막에는 소통의 힘을 느끼고 화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과정이 결코 재미있고,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비단 큰 연대의식으로 묶인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소통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린 애초에 달랐으니까 안돼, 이런 식의 포기가 아닌 그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어 보는 것. 참.. 말은 쉽지만 역시 행동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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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전과 해결사, 그리고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모두 본 사람, 손!   

 내 친구들과 주변 지인에게 물어보니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대부분 보았지만 방자전과 해결사까지 모두 본 사람은 많지 않더라. 시라노와 방자전만 봤더라도 아~ 삼각관계로 얽혀 있어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구나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라노와 해결사를 본 이들이라면 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점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 영화에 모두 해당되는 공통점은? 배우 송새벽이 출연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막연히 주연이 되지 못한 조연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송새벽처럼 출연할 수 있다면 주연이 결코 부럽지 않다. 거의 동시에 개봉하는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고, 더구나 각 영화의 감초 같은 역할을 한다면야 카멜레온 같은 연기에 호평을 받는 영광도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방자전과 시라노에서 찌질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과 미친 존재감으로 확실한 자리를 굳혔다는 점, 연극 무대에서 영화로 전환할 때 조금은 어려울 것 같았던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사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되는 배우라고 생각된다.  

 내일 개봉하는 부당거래에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니, 이 쌀쌀한 날씨에 사람들에게 대박 웃음을 안겨 주기를 기대하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대박이 난 스타의 앞길에 걱정이 없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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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의 특권이라 여기며 유치하게 방황하던 학부생에게 대학원 진학의 문을 열어주셨던 교수님이 5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하셨다. 작은 케이크를 들고 교수님을 뵈러 가면서 혹시나 나를 기억하지 못 하시면 어쩌지, 그럼에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교수님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나를 반겨주셨고, 이미 저녁 식사를 마치셨지만 케이크도 맛있게 드셨다.   

 퇴근하고 나온 길이라 교수님의 공식적인 강의는 듯지 못했지만 외대 전철역 담벼락 밑에서 기차의 진동과 소음을 안주 삼아 참 이야기는 들을 기회가 생겼다. 교수님은 가장 먼저 내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참을 수 있는 인권 침해는 어디까지 인가를 물으셨고, 다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타인에게 가해지는 참을 수 있는 인권 침해는 어디까지 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져나갔다. 그래도 여행도 제법하고, 또래 친구들 보다 대담하게 노골적인 소설이나 영화를 보아왔던 터라 상상은 끝이 없이 펼쳐졌다. 두 번째 질문은 이미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인공에 감정이입한 경험이 있던 터라 새삼스럽지 않은 듯 했다. 그런데 교수님의 마지막 질문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너에게 가해지는 것과 타인에게 가해지는 것의 침해 정도가 비슷하니, 차이가 나니.  

 당연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은 바로 저 둘 간격의 차이가 커지면서 발생한 거란다. 내가 당하는 것이 아니니까 괜찮아라는 무관심과 소극적인 태도가 이 사회의 비극을 낳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교수님은 사회 고위층과 특권층일 수록 의식적으로 저 두 사이의 간극을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우리들도 포함했음은 물론이다.  

 책을 사면 열의 여덟은 소설이고, 주말 아침은 무조건 극장에 앉아 있는 나의 습관은 알게 모르게 상상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 오고 있지는 않았는지 싶다. 많지 않은 나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어쩔 땐 너무나 태연한 내 자신에게 놀랄 때가 적지 않다. 누군가는 타인의 불행이 위안이 된다고 하는데, 타인의 불행에 먼저 가슴 아파야 하는 것이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모든 상황엔 역지사지가 존재한다. 내가 무통제를 찾을 수록 나에 대한 타인의 감정 또한 그럴 것이다. 지금 나는 알게 모르게 맞아왔던 무통제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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