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 이런 완전한 순간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그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다. 완전한 환희나 절망, 무엇이든지 잡물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것에 의해서 뒤흔들려 보고 싶다. 뼛속까지. 그런 순간에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있다.내가 지닌 여러 가지 제안이나 껍질에 응결당함이 없이내 몸과 내 정신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무한 속에 내던지고싶다.그리고 나에게 여태까지 그냥 주어지기만 했었던 생을앞으로는 내가 의식적으로 형성하고 싶다. 내 운명에 능동적으로 작용을 가하고 보다 체계화에 힘쓰고 싶다. 서론이라는 어떤 한계선을 경계로 해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피동에서 능동의 세계로 들어가서 보다 열렬하게일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
우수 짝새가 발뿌리에서날은 논드렁이에서아이들은개구리의뒤ㅅ다리를 구어먹었다개구멍을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잡은눞의피같은물이끼에 해볓이 따그웠다돌다리에앉아날버들치를먹고 몸읗말리는아이들은 물총새가되었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바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 봤다.또 한 번 읽어 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 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공기마저도 달라져 있었다. 옛날의 메마르고 거친 바람 대신에 향긋한 냄새를 실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 같은것이 저 높은 언덕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숲 속에서 부는 바람소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못 속으로 흘러드는 진짜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만들어진 샘에 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그 샘곁에 이미 네 살쯤 되어 보이는 보리수가 심어져 있는 것이었다. 벌써 잎이 무성하게 자란 이 나무는 분명히 부활의 한상징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반면 아렌트는 행위라는 활동, 즉 인간의 정치적 활동은노동이나 작업과 달리 서로 다른 복수의 인간들 사이에서 "사물이나물질의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29)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노동처럼필연적인 자동화의 과정 안에 포섭되지도 않고, 작업처럼 어떤정해진’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도 않은 채로 말이지요. 물론 아렌트도인간들이 사물이나 물질로 구성된 세계 위에서 관계를 맺는다는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행위란 기본적으로 의견을 나누는활동인데, 의견이란 자기에게 나타난 것, 즉 그리스어로 도케이모이dokei moi를 언어화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세계에서 그가처한 시좌/관점perspective에 따라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또한아렌트는 행위가 삶의 생물학적 필연성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나가능하며, 행위 역시 그것이 지속적으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행위를 물화해 줄 이야기꾼의 작업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즉 노동과 작업이 행위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그것은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기도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활동의 독립성을 굳이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이 활동이 갖는 다른 활동과의 차이를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고, 즉 그것이 갖는 지극히 인간적인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