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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자마자 속기 시작했다 - 의심 많은 사람을 위한 생애 첫 번째 사회학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8년 1월
평점 :
<뒷표지 글>
"부모님 말씀,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착한 사람들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들은 벌을 받는다."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 "친구를 사랑해야 한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알고 있던 숭고한 가치들
믿음, 사랑, 소망, 애국, 도덕, 성실, 열정, 인내....
이 가치를 기준으로 열심히 살아왔건만,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까?
세상이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많고 비상식적인 사건들이 많을까?
혹시 지금 내가 힘든 것이 내가 믿었던 그 숭고한 가치들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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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짜릿하다.
스릴러를 연상시키듯 나를 깜짝 놀래켜 줄만한 내용들이 잔뜩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책을 읽은 후 내 마음은.. 기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단, 나의 무관심과 무지, 의심하지 않았던 습관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성향들을 반성했다.
몇 년 전에 웹상에서 '프로 불편러'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불편함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들을 비꼬는 말투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럴 거면 한국에서 살지 마라. 뭐 그정도로 그렇게 발끈하느냐. 그래서 뭐?? 등등
잘 길들여졌던 나는 불편하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들도 그걸 비꼬는 사람들도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냥, 왜 불편해 할까 생각하고, 그걸 왜 비꼬지라고 생각했을 뿐.
그렇다고 나도 그래야지, 아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이런 반성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잘(?) 길러졌는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많은 생각과 행동들은 정말로 내가 원했던 일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회 환경이 나를 그렇게 키워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많은 내용들이 내 뒷목을 잡았다. 이걸 다 어떻게 얘기하지 싶을만큼 많은 내용들이..
나는 저자와 비슷한 70년대 생이다. 8~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여자다. 의심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내 삶이, 남을 의심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 내 생각들이 왜이리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개인이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가 개인에게 어떤 강요를 하고 있는지 말한다. 이런 사회를 드러내는 숫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제대로 바라볼 시야를 갖추웠다면 더 구체적인 사회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장을 추적하고,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느끼는 순수한 감정을 의심하고 한 개인이 특정한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햇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한다.
우리에게 정말 자유의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저자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유의지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것대로 살지는 않는다(p.21)"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가 어떤지와 무관하게 '내가 삶을 주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며 이 착각을 깨트려야 한다고 한다. 사회는 명백히 존재하고 그것은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라는존재가 내 피부와 밀접히 닿아 있음을 느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해야지만, 우리는 사회 변화를 적극적으로 촉구할 수 있다(p.23)고 말한다.
가톨릭에서 사제(신부)의 자격에 여성을 제한시키는 것(p.50)에 대한 문제도 언급한다. 사목 활동으로 남성이 적합하다는 하느님의 뜻으로 봐야 한다는 가톨릭의 입장은 2000년 전 이야기를 근거로 내세운다. 과거와 현재의 다른 사회적 기준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핵심은 개인이 사회라는 벽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사회 안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나를 위해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도 비로소 가능해진다(p.51)고 저자는 말한다.
박정희 정부가 강조한 이순신 장군과 신사임당에 관한 이야기는 나에게 충격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없었던 현모양처가 1960년대와 70년대에 전형적인 한국 여인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남성은 산업 현장에서 불만 없이 죽도록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과 자녀 교육을 불만 없이 책임져야만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독재는 은폐된다(p.84)는 이야기는 그렇게 살아온 나에게 이건 뭐지? 의문을 남긴다.
아기돼지 삼 형제와 자본주의 논리에서는 우리가 어떤 특정 대상을 보고 '좋고 나쁨' 혹은 '옳고 그럼'이라는 가치판단을 이미 학습당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 우리는 어떤 대상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준에 따라 '좋다' '나쁘다'라는 평가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으며 대상의 원래 상태가 어떻든 간에 우리는 강요받은 이미지로 현상을 받아들인다(p.95)고 말한다.
1980년대 담배는 불쾌한 이미지라기보다 적당한 기호라고 생각했다. 나쁜 기호식품이지만, 성인 남성들만이 할 수 있는 마초적인 성향을 잡은 어떤 낭만을 기억하게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도 담배를 피우느냐'며 불쌍한 사람 보듯 쳐다본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 아파트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미지가 변한 것이다.
인천국제공항이 각종 평가에서 '1위'로 선정된 사실을 들여다보는(p.166) 내용도 흥미로웠다. 나는 마냥 인천국제공항이 서비스가 좋으니까 10년 연속 세계1위의 자리를 유지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85.6%가 비정규직이라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서비스가 좋지 않았다면 자리를 위협받을 수 있는 비정규직원들의 눈물이 떠올랐다. 이것이 서비스 1위의 이면이라고 저자는 꼬집는다.
저자의 대안은 이렇다. '정치적 시민'이 되는 것. 생각부터 다르게 해보자는 것. 대안이 없어도 비판할 수 있다는 것. 대안 없는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그밖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즈음 해두고 싶다. 책에는 훨씬 더 많은 사례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이 많다. 중년이라면 중년 나름대로, 청년이라면 청년 나름대로, 노년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재미있는 사회학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 쯤은 읽어보길 개인적으로 희망한다.
p.159
비판의 초깅 거세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먹고사는 문제에만 물두한다. 비판이 없으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비판은 ‘때‘가 없다. 목격하고 인지하는 순간이 ‘때‘다. 비판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이성‘에 충실한 인간의 자격이자, 더 나아가 자신이 동물과 다른 인간임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오늘의 지혜가 내일의 어리석음이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언제나 당신의 믿음을 의심하길 바란다. "인류가 성인이라 칭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기청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혁명성"이었음을 기억하자.
p.195
감정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띤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오랜 기간 이어지고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삶의 바탕이다. ... 감정을 사회적인 지평에서 분석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의 습관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당연시되는 감정이 일정한 사회 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서의 얼개를 비판적인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김찬호) 중에서...
p.289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애국의 가장 고귀한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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