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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하나
고정희 지음 / 푸른숲 / 1996년 11월
평점 :
품절
학교에 시인겸 교수님에게서 우연히 본 사진 한 장. 그 사진은 교수님과 함께 찍은 광대뼈가 튀어나온 짧은 머리에 섬머슴아 같은 여자와의 오래된 흑백사진이었다. <생전에 고정희시인과 함께>라는 제목 아래 놓인 사진을 난 한참 쳐다본다.
죽음. 어느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한 인간의 삶을 마감하는 일. 고되게 일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갈등한 그 수많은 날들 중 단 하루도 똑같지 않은 긴긴 날들을 마감하는 일.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든 그 삶은 나름대로의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글을 쓰는 시인이라는 여자.
문득 이 여자가 궁금해졌다. 인터넷검색어로 찾은 것은 91년 지리산에서 실족사 했다는 것과 '고백' 이라는 시 하나였다. 나의 궁금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아 그녀의 사후 첫 시집과 함께 두 권의 시집을 구입했다.
<아름다운 사람하나> 빳빳한 표지 첫 장을 넘기자 당장이라도 후두둑 눈물을 쏟아낼 듯한 기묘한 표정에 그녀가 오른손으로 이마를 괴고 있다. 슬픈 눈. 뭔가 질문을 던져놓고 진지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다. 그녀의 행적은 다양했다. 특히 여권신장에 뚜렷한 기여를 했다는 것과 짧은 생을 보상하려는것 만큼 활발하고 많은 소속단체들.
그녀의 시는 신비롭고 야릇하다. 뭔가 홀린 듯 훌쩍 훌쩍 넘겨지는 책장들. 하지만 전혀 가볍지 않다. 섬머슴아같은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시어들은 때론 강하고 때론 부드럽다. 잘 짜여진 삼베처럼 정갈하고 깔끔하다. 여리고 순수하다. 누군가를 갈망하고, 사랑하고, 고대하고, 그리워한다. 그 대상이 신이든 자연이든 사람이든 그것은 여느 여자가 한 대상을 두고 심한 열병을 앓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래저래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앞선다.
짧은 시지만 강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전보]라는 시와 쉽게 다루지 않는 잊혀진 것들에 대한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 그리고 [어머니의 나라]나, 남북의 분단을 주재로 한 [눈 내리는 새벽 숲에서 쓰는 편지]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시들이 많았다.
시에서 그녀는 어디든 항상 떠나간다. 특히 지리산의 봄(부제-뱀사골에서 쓴 편지)는 이 시집에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산을 사랑하고 좋아했던 그녀. 시의 마지막 구절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라는 글귀가 괜시리 눈에 밟힌다.
이젠 그녀는 없고 그녀가 남긴 말처럼 어느 하나 눈물 없이 쓰여질 수 없었던 시편들만 남았다. 아픔의 글귀들. 그 글들이 가슴에 차곡차곡 들어와 앉는 느낌이다. 그녀의 낡은 사진을 보며, 이 여자의 슬픈 눈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