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에 대하여 

 장 필립 투생은 미니멀리즘, 누보로망  작가로 메디치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그는 1975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정치학을 전공했고, 소설은 물론 영화를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많은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뚜렷한 이미지가 뇌리에 박힌다. 
그는 1984년에 [욕조] 를 발표하면서 데뷔한다. 
( 욕조는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한 명작이다. 
국내 시인 중에는 그의 소설을 읽고 시를 쓴 작가도 있다. 작품은 다음과 같다.)

 해변의 욕조ㅡ 장 필립 투생
박정대 

욕조는 아름답다, 텅 비어 있는 
그리하여 알몸의 꽃을 심을 수 있는 
욕조는 아름답다, 나는 욕조를 바라본다 
하루 종일, 욕조 속의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샤워를 하기도 하고, 꿈을 꾸는 듯 
먼 곳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듯 
수영을 하기도 한다, 수영을 하는 여자의 
알몸은 아름답다, 나는 해변으로 가려고 한다,
나는해변이다, 해변의 꽃 모종을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나의 몸에 꼭 맞는 욕조를 가진 적이 있었다,
종종 그곳에서 알몸으로 누워 삼류 소설을 읽기도 했다

외출할 때는 욕조를 입고 나다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요조숙녀라고 불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욕조 속에서만 알몸이었고 나의 알몸을 느낄 수 있었고
알몸과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다시 한번 욕조숙녀라고 불러주었더라도 
괜찮았을텐데, 나도 언젠가는 나의 몸에 꼭 맞는그런 욕조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몸의 나와 
오래도록 부드럽고 긴 섹스를 한 적이 있다


 [욕조]로 등단한 이후로 투생은 [씨],[사진기],[묵설법],[텔레비전],[사랑하기],[도망치기]등의 작품을 꾸준히 빌표하면서 90년대 중요한 작가로 인정 받는다. 투생은 이미 말한 것처럼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그러나 <쥘과 짐>의 프랑소와 트뤼포는 투생에게 충고했다.

 "영화를 하려다 잘 안 되는 사람들은 펜과 종이만 있으면 뭐든지 창작할 수 있는 글쓰기에 전념하는 게 낫다."

 투생은 트뤼포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프랑스 문학계에서 매디치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총망 받는 작가가 되었고
그의 소설들은 계속해서 영화화되기에 이른다. 

 그의 작품들 중 영화화된 건 다섯 편이나 된다.그는 그 영화 중 한편과 바로 `사진기`를 들고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투생은 로브그리예와 뒤라스의 누보로망 계보를 이으면서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미니멀리즘과 누보로망에 대해서는 따로 페이지에 적겠다)
또한 평단에서는 그의 작품을 시적이라고 표현한다. 

투생이 [욕조]에서 언급하고 있는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기표와 개념만을 넌지시 제공함으로서 독자 스스로 그 여백을 채워넣을 수 있게 하는 미덕
그것이 투생 소설의 힘이다.


2) 대표작인 [사진기]의 내용

 사진기의 주인공 `나`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이다.운전교습소에서 만난 파스킬과 이리저리 연애 행각을 발이지만,지리멸열한 일상을 허물어내지는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파스킬과 여행을 하게 되는데,그는 충동적으로 사진기를 훔쳐 마구 사진을 찍다가 필름을 빼고는 사진기를 해초가 있는 바다 속에 던져버린다. 그는 우뚝 서서 수면을 바라보며 자신이 바다에 버린,지금은 수심 밑에서 녹슬고 있을 사진기를 생각한다. 그 후,인화된 사진들을 살펴보다가 그는 우연히 파스칼의 모습을 발견한다. 사무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파스칼의 모습을. 그는 어떤 충동에 이끌려 파스칼이 있는 파리로 떠나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하지만,이미 기차는 끊겼다.그는 허탈감을 느끼며 방황 한 후,조용히 파스칼의 전화를 기다린다.

 "현재 이 순간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그 덧없이 사라지는 축복의 순간을 고정시켜 보려고 애썼다.마치 살아 있는 나비 몸뚱이를 바늘 끝으로 고정시키듯,살아 있는 나비를."

 이렇게 끝을 맺는 [사진기]는 스토아 철학의 "아파데니아"를 추구한다. `어떤 상처나 공격도 고통도 없는 어떤 다른 삶`,이것은 외재하는 욕망의 관계를 요구하지 않는 고통이 평정된 삶일 것이다.

 또한 [씨]의 마지막 문장, "인생,그건 씨에게 식은죽 먹기였다."이 말은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고통과 좌절을 온몸으로 느낀 뒤,그것에 지지 않고 극복해 낸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어쩌면 투생은 사진을 찍듯이 써내려간 [사진기]를 통해 이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외재하는 사물을 중화시키고 내면의 평정을 유지하게하는 탁월한 삶의 수단일 것이다.

 아닌 척 하면서 독자를 감동시키는 것, 살인으로치자면 살인을 당하는 사람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자기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능청스럽지만 확실하게 죽이는 살인처럼, 투생은 독자를 적당한 순간에 탁, 낚아챈다.

 그의 소설에서는 무거움을 넘어선 유머와 평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소설이 질문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 어떤 것보다도 단단하다.

"겉으로보기엔 애매모호한 나의 접근 방식이란, 마치 포크로 올리브를 찍어올리기 전에 올리브를 들들 볶아 탈진시키는 것처럼 내가 직면하는 현실의 진을 빼는 효과를 갖고 있으며, 결코 무리수를 두지 않는 내 성향은 내게 불리하기는커녕 일이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보이는 순간 탁,낚아채는데 유리한 상황을 미리 마련하게 하는 료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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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30th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초창기 단편들과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등을 좋아하고
10억의 선인세를 받고 나왔던 [1Q84]나, 얼마전 나왔던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는 애매함만 느꼈던 독자로서.
하루키의 매리트의 근원은 무엇인지.
그의 책들이 정말 문학적 완성도를 지금도 보이고 있는지.
아니면 첫 작품이 좋으면 습관적으로 그냥 다음 책이 나오면 무조건 사는 
독자들을 겨냥한 판매가 성공한 케이스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국내에서 단편 외에 하루키를 널리 알려주었던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 적어가 보자고 한다.
왜냐하면, 그를 알린 첫 장편이기도 하고
이후의 그의 많은 장편소설에서 같은 구조와 비슷한 인물, 비슷한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 원래 본인은 독서일기를 개인 파일이나 노트에 다양한 시선으로 논문형식으로 적는다.
하지만 게으른 내가 그걸 온라인에 또 올리는 일은 드물 것 같다.
주로 이곳 온라인 서재에는 100자 이내의 짧은 감상만 적는다.
하지만, 가끔은 이번 하루키 편처럼 원래 적어둔 독서일기를 그대로 올려볼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 독서 후기는 (소제목 목록 포함) 총 10장으로 나눠 썼으며, 며칠에 걸쳐 한장씩 옮겨보려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1)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으로 본 노르웨이의 숲
이 내용은 "국외순문학" 마이리뷰에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로 살펴 본 [노르웨이의 숲]
    (1) 기즈키의 자살과 나오코의 세계
    와타나베는 비행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노래를 듣거 나오코에 대한 혼란스러눈 기억을 떠올린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유일한 고교시절 친구인 기즈키의 연인이었다. 나오코는 기즈키라는 존재와 함께 둘만의 `완전한 세계`를 추구했다.여기서 `완전한 세계`라는 개념은 소에다 라오코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어릴 때부터 둘이서만 자랐기 때문에 바깥세상에 나갈 수가 없었다.무인도에서 자란 알몸의 아이란 많은 인간이 사는 실제 사회에 나갔을 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 없이,쉽게 상처입고 지쳐가는 것과 같은 정신벅으로 미숙한 두 사람의 미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나오코는 기즈키의 둘만의 세계는 두 사람이 성장해갈 수록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이런 결과로 기즈키의 기즈키의 자살 원인은, 기즈키와 나오코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결과로 만들어진 `완벽한 세계`가 없어질 상황에 놓이게 되고,사회에 나와 일하면 나오코와 기즈키 외의 타인이 둘만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고 그 결과 `완벽한 세계`는 무너지게 된다.기즈키는 그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안고 있었기에 자살했다고 볼 수 있다.       나오코는 기즈키의 자살 동기를 알지 못했음은 물론 예상도 하지 못했다. 기즈키의 좋은면만을 봐 온 와타나베와 나오코 셋이서 있는 것이 좋았다는 말은,바꿔 말하면 기즈키의 단점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나오코는 기즈키의 단점을 알고 받아들이기보다 회피한 것이다.
   당연히 기즈키의 죽음 이후 나오코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특별히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예전과 달리 혼자 남겨진 나오코는 말을 함으로서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그녀의 행동이 서투르고 말을 잘 하지 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오코는 자신의 스무 살 생일 밤에 와타나베와 자려고 한다.그것은 자신의 결핍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기즈키는 나오코에게 있어 자신과 다른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와도 같았기 때문에 서로 관계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다기보다는 `불필요`했던 것이라 추측해본다. 나오코에게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채우고자 하는 행동,즉 섹스가 필요 없을 만큼 자신의 일부인 기즈키와 함께 함으로서 둘은 완전하다고 느꼈던 것이다.기즈키와 와타나베와의 우정이 바깥 세계와 소통하려는 시도였던 것처럼,나오코 또한 와타나베를 바깥세계의 사람이라고 여긴 것이다.
   기즈키가 죽은 후 와타나베와 육채적 관계를 맺은 일은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사도였다.그러나 그 결과는 나오코에게나 와타나베에게나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없다.기즈키와는 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 없었는데 어째서 와타나베와는 쉽게 반응했을까하는 죄책감을 동반한 의문이 나오코를 끝까지 괴롭혔을 것이다.
   나오코와 기즈키 둘만의 세계는 나오코 자신이 완전하다고 믿었던 것뿐이지 객관적으로 완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둘이 완벽한 하나가 된 둘만의 세계라면 서로의 고민과 깊은 속내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했다.나오코와 기즈키 사이의 블완전성은 나오코가 기즈키의 자살로 인해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를 마지막까지 힘들게 했다고 볼 수 있다.

   (2) 자폐의 상징, 말과 세상 회피
   나오코는 자폐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그 결향은 더욱 부각된다. 나오코가 자폐적 성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은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 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증상으로 이른 바 `말 찾기 병`증상을 보일 때이다.   나오코는 기즈키가 살아 있을 때에도 기즈키 없이 와타나베와 둘만 남겨졌을 때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는 것은,기즈키 없이 혼자만으로는 바깥 세상과의 교류가 어렵더는 것을 모여준다.기즈키는 와타나베를 바깥 세계와 교류하기 위한 연결 고리라고 여기고 와타나베를 통해 외부세계에를 바라본다.   나오코의 스무 살 생일 밤,와타나베와 둘이서 생일파티를 했을 때 나오코는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고 이야기 전개도 비상식적인 것을 볼 수 있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자신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 하고자 했을 것이다.그러나 말이 서툴기 때문에 (그래본 적이 없기 때문에)나오코의 이야기 전개는 비상식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양원에서도 편지를 고쳐 써서 보내고 잘 보낼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오코는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다 와타나베가 두 번째 방문에서 함께 살자고 하자 혼란스러워한다. 그녀는 요양원에서 나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 했고,혼자만의 `완전한 세계`(이제는 기즈키가 없기에)에서 벗어나 바깥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을 것이다. 알반적으로 자폐상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와 질서,공간이 바뀌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나오코의 자살을 부추기게 된 것이다.   나오코는 어렸을 적에는 기즈키와 둘만의 `완전한 세계`에서 살다, 기즈키가 죽고 난 후에는 아미료 요양원에서 혼자만의 세계,실재 세상과 거리를 둔 공간에서 지내왔다. 그런 그녀에게 요양원을 나와 와타나베와 함께 산다는 것은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세상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음 보다 더.   
   (3) 아미료 요양원,혼자만의 완전한 세계
   아마료 요양원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곳이다. 미움도,증오도,사랑도 없는 완전히 무중력 상태의 안공적인 세계와 같다. 와타나베도 아미료 요양원을 찾아갔을 때 바깥 세계와는 상장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요양원 방문 후 다시 세상 속으로 나와 세상을 느끼던 와타나베의 느낌도 달랐었다,    요양원 사람들이 하고 있던 테니스 게임이 누가 이기고 지는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공의 탄성에 흥미를 두고 주고받기만 할 뿐이라고 느꼈다는 자체가 라나의 묙표를 위해 앞다투어 다투는 경쟁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욕망이 없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하지반 욕망이 없는 세계가 과연 인간에게 진짜 세상일까?) 또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같은 음량으로 이여기하는 광경은 감정의 기복 없이 살아가는 (진짜 세상을 거부하는)요양원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와 육체 관계을 가진 후,아마료 요양원으로 들어가기 직전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재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깥 세계와 차단된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신경을 절대적으로 안정시키는 일이야."
   그러나, 나오코는 바깥 세계와 일시적인 격리 이상으로 타인과의 교류가 필요 없는 혼자만의 세계를 꿈꾸었다. 잃어버린 마음, 닫힌 신체에서 (기즈키와는 불가능이 아니라 불필요했던 섹스가 왜 와타나배와는 했는지 나오코는 끝까지 고뇌 했을 것이다.) 와타나베와의 일을 통해 육체적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나오코는 요양원이라는 장소의 시스템을 빌려 타인을 거부하고 스스로 닫아버린 것이다.   와타나베에게 요양원으로 면화와줄 것을 희망한 것은 그녀가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음을 보여주며,와타나베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곧 바깥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오코는 자살하게 된다.   나오코의 몸은 와타나베와 잤던 이후로 전혀 육체 관계에 반응하지 않는다,드것은 그 시절에는 기즈키와의 세계에서 이탈되어 상실된 자신의 일부를 와타나베와의 섹스로 매우고자 했지만,요양원이라는 완벽히 고립된 세계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개 된 후에는 다시 와타나베에게 신채적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가토 고이치는 나오코가 와타나베와 마도리의 관계를 의식함으로써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하지만,이것은 나오코의 마음을 잘못 읽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의 말처럼 미도리와의 관계로 인해 나오코가 상심에 빠졌으며,와타나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라면 와타나베의 두번째 방문 직후 (와타나베가 같이 살자고 한 후)부터 병이 악화될 것이 아니라,와타나베가 마도리와의 이야기를 편지에 써서 보내고 그것을 읽은 후부터 병이 악화되었을 것이다.나오코는 와타나베가 두번째 방문하기 전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였다.그러다 와타나베가 같이 살자고한 두번째 방문 이루 갑자기 상테가 악화된다.   나오코의 "나비 핀"은 자폐를 상징하는 의미 중 하나이자 혼자만의 `완전한 세계`를 꿈꾸고자 하는 그녀의 심리적 메타포라 할 수 있다. 와타나배와 우연히 교토 전차에서 만났을 때 나오코는 `평범한 머리핀`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양원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나비 모양의 핀`을 하고 있었다.   문학 작픔에 나타나는 나비의 경우,빛의 세계를 지향하는 무의식을 상징하거나 하늘의 세계 또는 천상의 빛을 갈망하는 영혼을 암시한다. 나비는 인간의 혼이며 생명으로 인간 혼의 비상을 의미하며,인간의 자량성을 축소시키는 내면 의식을 나타낸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비는 나오코를 상진하는 것이고 있다. 나비는 애벌레로 있다 번데기의 과정을 거쳐 성충이 된다. 나비는 볼품 없는 유충에서 번데기의 고정을 고치며 완벽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나오코는 와타나배와의 관계에서 페쇄적인 세계가 구축될 수 없으며,요양원이라는 바깥세계와 차단된 혼자만의 세계에 머물러야 완전함을 느낀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비 모양의 핀은 나오코의 삶,그 자체를 상징하며,이것은 와타나베가 꾼 꿈에서도 암시가 되어 나타난다. 요양원을 방문해 나오코가 잠시 나가고 잠이 들었을 때 와타나베는 나비에 관한 꿈을 꾼다.   와타나베는 요양원에 들어간 후 변한 나오코를 보고 반년 만에 여성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가하고 놀란다.불완전했던 몸이 완벽하게 성숙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녀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지만 나비 모양의 헤어핀만 꽂고 있었던 것이다. 나오코의 그런 모습에 와타나베는 실제로는 아주 가까이 있어도 몇광년 정도 떨져 있는 것차럼 느낀다.   나오코는 스스로 말했듯이 페쇄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고,급기야 혼자반의 세계에서 나오는 것을 거부한 채 죽음을 선택한다. 객관적으로 그것이 가능했다면 기즈키나 나오코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죽음은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한 완벽한 세계의 구축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그것이 `숲`이라는 공간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하루키가 보여주는 세계일 것이다.   
   (4) 미도리의 세계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통해 련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생한 기분을 느낀다. 미도리 또한 타인의 죽음을 경험했고 죽음이 만연하는 곳에서 살아왔다.그러나 미도리는 주어진 현실에서 피하지 않고 살아간다.와타나베는 세상과의 교류를 피하고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살아온 인물이다.그와는 달리 미도리는 현실에 맞서 열심히 살았고,그것은 그녀의 중,고교 시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미도리는 처음엔, 와타나베에게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입원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우루과이에 갔다고만 했다. 여기서 미도리는 우루과이의 경제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데 그것은 그녀의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다.   `당나귀 똥이 가득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간병에 지치고 고독한 미도리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이자 미도리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그녀만의 기호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유난히 죽음이 많이 나온다. 작품 속 등장인물 와타나베와 나오코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다른 인물의 죽음에 가까이 있는데 미도리 또한 예외는 아니다. 미도리는 다른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이 살아왔고,죽음이 생명의 영역을 침범해가는 과정까지 낱낱아 봐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도리는 인간의 중대한 관심사이자 공포 대상인 죽음을 겪어야 하는 삶에서 도망치지 않고 억척스럽게 견뎌낸다.

   (5)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미친 영향

  [노르웨이의 숲] 은 1959년 1970년이 배경이다. 그 시대의 젊은 여성인 미도리의 연애관은 작품을 닝ㄱ는 련재 젊은 여성들에게도 공감을 일으킨다. 미도리는 자신의 응석을 다 밥다줄 수 있는 사랑을 원하고, 그런 미도리의 애정관을 '케니크'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이ㅛ다.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6) 사랑의 허구 
   (7) 사랑의 가능성

3)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4)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일번 전겅투 세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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