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사랑 - 다섯 영혼의 몽환적 사랑 이야기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늦은 밤. 식구들은 오늘따라 각자의 사정으로 귀가가 늦어지고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는데 거기에 날씨까지 흐려주면
이 상황은 바로 공포물 접하기 최고이면서 동시에 최악의 조건이다.
하필 내가 새빨간 사랑을 손에 든 날이 그러했다.
가족들의 갑작스런 늦은 외출과 적당히 흐린 날씨...
게다가 나는 사실 겁도 많아서 무서운 이야기를 접하면 며칠동안은 자꾸 뒤를 돌아린?되고
혼자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벌벌 떠는 주제에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_-;
그렇게 최고이면서 그래서 최악인 조건에서 나는 새빨간 사랑을 읽게 되었다.

책을 처음 접했을때의 표지의 아름다운 소녀의 강렬함은 첫번째 이야기 <영혼을 찍는 사진사>를 읽은 후에는 오싹함으로 변해버렸다. 소녀는 잠든 걸까 죽은 걸까 하던 의문을 날려버림과 동시에 소녀의 생사여부를 떠난 인간의 경악스러운 욕망으로 몸서리쳐졌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죽은 자가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 뒤틀린 욕망을 움켜잡으려고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멈출줄 모르고 폭주해버린 욕망이 죽은 자를 또 한번 죽게 하고 새로운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첫번째 이야기의 으스스함에 잠시 호흡을 고르고 두번째 이야기 <유령소녀 주리>로 넘어가자 이번에는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이 나를 덮친다.  평소에도 친구들로부터 '애정결핍자'라는 놀림을 받는 나에게 주리의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든 버거움이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고 아무도 내 말을 듣지 못하는 소통의 단절. 게다가 그 단절은 일방적이라서  서글픈 메아리만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슬픈 메아리를 끝낼 수도 없는 상황이 영화 '하이랜더'를 떠올리게 했다.
절대 죽지 않는 운명의 주인공. 다른 사람들의 삶은 곁에서 끝까지 지켜봐줄 수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의 삶은 끝도 없고 그래서 누구도 그 사람의 끝은 지켜봐 줄 수 없는... 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을 반복해야만 하고  또 떠나보내기 위해서 다시 맞이해야 하는 자의 슬픔과 고독. 그래도 '하이랜더'의 주인공은 "관계"를 통해 형성된 상호간의 슬픔과 고독이지만 <유령소녀 주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마음 밖에 없는 존재"
그 마음을 전할 수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을 수도 없다.
그야말로 마.음.만 존재하는 유령소녀 주리.
씁쓸한 말투가 아닌 오히려 당당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툭툭 내뱉던 주리의 말들이
점차 그 아픔을 토로하며 급기야 너무도 나약한 진심을 바닥까지 드러내 보였다.
자신을 향한 진짜 웃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을 수 있었던 지금이 너무도 늦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면서...
세번째 이야기 <레이니 엘렌>
시부야거리에서 사하라는 생각한다. 거리의 인파들은 수조속의 열대어같고 자신은 흙냄새나는 민물고기같다고.
소설가가 되고 싶던 꿈은 종말을 맞이하고 감흥없는 상대와 욕구를 해결하며 사하라는 표류하고 있었다.
서로의 등만 바라 볼 수 있을 뿐인 거리에서 사하라는 그리고 리카는 무엇을 찾아헤매던 것일까.
그들만의 마쓰리로도 그들의 공허함은 채울 수 없을텐데... 그저 너울너울 춤추는 풍선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네번째 이야기 <내 이름은 프랜시스>
이번에는 미니디스크를 통해 녹음된 R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조금 소외된 학생이었던 R의 담담한 이야기인가 했는데 R은 자신의 악벽을 털어놓고 그 악벽으로 인한 상처와 그 상처보다 더 큰 가족들의 외면이 가져온 전혀 다른 방향의 인생을 말한다. 지금까지의 사연으로도 충분히 기구한 삶을 산 R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사연은 앞으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였다. 진짜 이야기는 M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저 두 사람은 영혼으로 묶여 있구나.'
하고 M이 데려간 테이블나이트에서 깨달은 순간 내렸을 R의 결정은 이미 예상할 수 있던 결정이었음에도 충격적인 행동이었다. 그저 스토리만으로는 경악할 법한 이 이야기에서도 작가의 확신어린 문체로 나는 결국 설득당해서 '그렇게라도 해서 좋다면 뭐 그건 그것대로 좋겠지' 싶은 마음까지 들고야 말았다.
다섯번째 이야기 <언젠가 고요의 바다에>
소년 가쓰야가 소네 아저씨 그리고 공주님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월성인인 공주님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것은 바로 달의 물뿐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음식을 모으기 위해 필요한 월광렌즈. 그리고 월광렌즈의 비밀.
고요의 바다에 가고 싶다는 공주님의 말에 언젠가 자신이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한 가쓰야는 월광렌즈의 비밀을 알고도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주인공도 소년인데다가 월성인이라니. 이번 이야기는 꽤 귀엽네. 하는 순간 뒷통수를 맞고 말았다.
이 굉장한 이야기꾼에게 또 당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떠드는 반전따위가 아니다.
<유령소녀 주리> <내 이름은 프랜시스>는 제목에서 이미 내용 혹은 장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가 끝에 가서 한번 더 살며시 하지만 확실하게 내 심장을 조여왔다.
옮긴이의 말처럼 그저 공포물로만 보려면 부족한 점이 많을 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작가만의 따스하면서도 서글픈 감성으로 다른 흔한 공포물보다 더 묘하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도시의 그늘에 서식하는 다섯영혼의 사랑이야기'라는 번역가의 말.
도시의 그늘 그 외로운 곳에서.
외로운 자매, 샐러리맨 사하라, 유령소녀 주리, R 그리고 소년 가쓰야의 새빨갛게 강렬해서 더 외로운 다섯 가지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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