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마크하기리처드 로티의 프래그머티즘사회적 독서




로쟈 (이메일 보내기) l 2007-07-19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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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교수의 칼럼에 대해서 몇 마디 적으려고 검색하다가 지난달에 세상을 떠난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나는 부랴부랴 마이리스트 하나 작성하는 걸로 추모를 대신했었다). 기사 끄트머리에 사회적 독서목록에 올려놓은 <인문정신과 인문학>(아카넷, 2007)에 실린 김우창 교수와의 서신대담이 언급되고 있어서 이 페이퍼 또한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대담 내용은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로티에 대해서는 기사를 읽어가면서 몇 마디 덧붙이도록 한다.



동아일보(07. 07. 17) 리처드 로티 교수 “보편적 진리는 없다” 플라톤에 반기

지난달 8일 미국 철학계의 이단자 리처드 로티(사진) 스탠퍼드대 교수가 췌장암으로 숨졌다. 향년 76세. 그는 ‘미국의 데리다’라 할 만큼 포스트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주요 외신에선 그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았고 국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그는 분석철학 중심의 미국 철학계에서 이단적 존재였다.(*그 정도로 조용했었다면 의외이다. 철학계에서야 이단적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저명한 '철학자'였는데 말이다.)



로티 교수는 진리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서구 철학 전통을 맹렬히 비판해 상대주의자, 현대의 소피스트, 반()철학자로 공격받았다. 다른 한편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상 멸실된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을 부활시킨 네오프래그머티즘의 기수라는 점에서 진정한 미국 철학자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그의 주저에 속하는 <실용주의의 결과>(민음사, 1996) 등이 모두 품절 상태라는 게 아쉽다.) 



한국 사회는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 속에 서구 합리주의 전통을 비판한 그의 이론 수입에만 급급했다. 1996년과 2000년, 두 차례나 그를 초청할 만큼 호기심은 컸으나 독일 철학이 강세인 한국에서 그의 철학은 여전히 겉돌았다. 별세를 계기로 그의 철학 세계를 들여다본다.

○ 로티는 왜 문제적인가
1931년 뉴욕에서 태어난 로티 교수는 14세에 시카고대에 입학할 만큼 조숙한 천재였다. 일찍부터 궁극의 진리를 추구했던 플라톤에 심취했던 그는 20세에 플라톤 철학의 한계를 파악하고 결별을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철학계는 논리와 언어를 중시하는 분석철학이 지배적이었다. 그 역시 분석철학으로 25세 때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30세에 프린스턴대 교수가 되면서 분석철학의 총아로 떠올랐다.(*그가 분석철학계에서 받은 주목은 저명한 논문모음집인 <언어학적 전회>의 편집을 맡았다는 점에서도 암시된다.)

 

그러던 그가 1979년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발표하며 플라톤 철학과 분석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첫 주저로 꼽히는 이 책에서 그는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로 이어지는 철학 전통을 본질주의, 정초()주의, 표상주의라고 비판하며 철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 진리를 담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발 더 나아가 ‘철학하기’와 ‘문학하기’를 동렬에 놓고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참신한가가 중요하다고 설파했다.(*국내에는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라고 어색한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다.)



이는 연암 박지원이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으로 몰린 것과 같은 파문을 미국 철학계에 가져왔다. 그는 결국 동료 교수와의 갈등 끝에 버지니아대로 옮겨야 했지만 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며 자신만의 철학을 펴 나갔다.(*로티는 프린스턴대 철학과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버지니아대의 '인문학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이후에 스탠포드대학의 '비교문학과'에 재직했다.) 

○ 로티는 상대주의자인가
로티는 참된 지식으로서의 진리는 언제든 오류 가능성이 있으며 인간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역사적 조건 하에서만 진리라는 프래그머티즘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이는 프래그머티즘이 실용주의로 번역될 때 발생하는 오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적당주의 내지 결과만 중시하는 도구주의에 빠졌다는 오해를 낳았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 사상가인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근본주의의 위험성을 가장 정교하게 이론화한 실천철학가로 재조명되고 있다.(*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이야말로 우리식으로 하면 '실학(實學)' 아닌가?) 



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은 여기에 공()과 사()의 구분을 도입했다. 타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실천이 공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이론화하는 것은 시를 쓰는 것과 같은 사적 행위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관점은 그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민음사, 1996)에 잘 나타나 있다. 알라딘에는 아예 서명도 뜨지 않지만). 이는 반()철학자라 불릴 만큼 급진적인 로티 철학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실제 로티는 이론적으론 포스트모던 문예철학을 펼쳤지만 이를 정치 현실에 바로 적용하려는 ‘문화적 좌파’를 비판하며 의료·교육·조세 개혁과 같은 구체적 민생정책을 지지했다.



로티 밑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이유선 군산대 연구교수는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라는 철학의 기존 담론구조를 버리자는 로티의 말을 상대주의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달은 보지 못하고 이를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이유선 교수의 <리처드 로티>(이룸, 2003)은 가장 평이하면서도 요긴한 로티 입문서이다.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해서는 리처드 번스타인의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가 아주 잘 씌어진 책이다.) 



○ 관련 저술
로티의 저술은 민음사에서 번역 출판된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실용주의의 결과’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등이 있다. 로티의 사상을 다룬 개론서로는 ‘리처드 로티’(이유선·이룸), ‘로티의 신실용주의’(김동식·철학과현실사), ‘로티’(데들레프 호르스터·인간사랑) 등이 있다.(*거기에 덧붙여, 로티가 추천사까지 쓴 마크 에드먼드슨의 <문학과 철학의 논쟁>(문예출판사, 2000)이 로티의 입장과 정신에 충실한 책으로 읽어볼 만하지만 국역본 번역은 암호문 수준이다.) 



한국학술협의회 학술지 ‘지식의 지평’ 최근호까지 2회에 걸쳐 실린 김우창 고려대 교수와 서신대담 ‘아시아의 주체성과 문화의 혼성화’에선 투병 중임에도 진지한 논쟁을 펼친 노학자의 정열을 확인할 수 있다.(권재현 기자)

07. 07. 19.

Rorty and His Critics (Philosophers & Their Critics) CoverTake Care of Freedom and Truth Will Take Care of Itself: Interviews with Richard Rorty (Cultural Memory in the Present) Cover

P.S. 로티에 관한 책으로 두 권만 더 언급하기로 한다. 하나는 <로티와 그의 비판자들>(2000)로 블랙웰출판사의 시리즈물 중 하나이다. 오래전에 교보에서 구입한 책인데 로티의 쟁점들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그의 답변들을 싣고 있다. 다른 한권은 내가 안 갖고 있는 책인데, <자유를 돌보아라, 진리는 스스로 돌볼 것이다>(2005)란 제목의 인터뷰집이다. 원제는 'Take Care of Freedom and Truth Will Take Care of Itself: Interviews with Richard Rorty'. 아마도 로티 입문서로는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리처드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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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실용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쟈의 방주




로쟈 (이메일 보내기) l 2008-02-0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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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너비가 페이퍼의 제한 너비를 초과한 글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새창에서 원래 너비의 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수신문에서 포커스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9). 최근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을 번역해낸 정해창 교수가 '실용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답하고 있는 글이다. 실용주의에 대한 개관 정도로 읽을 수 있겠다.



교수신문(08. 01. 29) '가능한 대안’ 모색하는 실천의 언어

1.
최근 서구에서 실용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지난 세기 미국의 철학을 주도해온 분석철학이 ‘분석을 위한 분석’에 매달리다 그 생명력을 소진하면서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신들이 무의식 중에 딛고 있던 실용주의 지반을 인식하고 그 진면목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활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이 ‘분석철학의 트로이 목마’라고 불리는 로티의 『철학과 자연의 거울』의 출간(1979)이다. 고전 실용주의자들인 퍼스, 제임스, 듀이가 활동하던 19세기말 20세기 초를 실용주의의 탄생기라고 하고, 20세기 중엽을 실용주의의 확장 및 정체성 확립의 시기라고 한다면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후를 실용주의 부활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 시기 뿐 아니라 당대의 실용주의자들도 실용주의에 대하여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로티와 같은 신실용주의자는 퍼스가 실용주의에 이름만 제공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나 한 곡조씩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는 어떤 것인가. 19세기말 20세기 초 태동기의 실용주의는 사후 한 세대 이상 묻혀 있던 비운의 천재 퍼스를 제쳐 놓는다면 제임스가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의미론이자 진리론으로서 실용주의는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출간(1907)되면서 그 대강의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 실용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철학을 정의해온 인식론과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관념은 그 의미와 진리를 행동을 안내하는 유용성으로부터 전적으로 도출된다는 실용주의의 주장은 얼핏 인식론을 부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은 앎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전통적으로 철학이 추구해온 앎의 ‘객관적’, ‘토대주의적(foundational)’ 준거이다. 달리 말하면 앎은 다양하고 도처에 널려 있는데 어찌 한 가지 그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기준을 통과한 것만 고집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인간의 끊임없이 인식작용에서 사변보다 실천, 행위를 우선시한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실용주의를 인식론적 지평을 넘어서 가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즉 전통적 인식론이 ‘객관’이라는 제약 아래에서 평면적이고 수동적으로 되기 쉬운 반면에 실용주의는 광범위한 실천을 바탕으로 변화와 새로움 그리고 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바로 가치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고전 실용주의가 탄생하는 배경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다. 우주가 진화한다는 것은 우주가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대륙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처녀림이나 다름없었던 미국은 그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진 나라였다. 다위니즘은 이런 지적, 문화적 환경과 잘 융합하는 이론이었고, 실용주의는 전통적으로 무시간적 진리만을 고집하던 철학에 시간 즉 변화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변화는 곧 행위를 의미하고 “모든 관념, 사유는 행위를 위한 계획이다”라는 실용주의의 언명은 모든 지적인 노력은 인식자와 무관한 관념에 의해서 결정되는 순수하고 이론적 앎으로 귀결된다는 전통적 주장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실용주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 사유 양상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유가 행위로 이어지지 않거나 종료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에게 정신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기질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언명은 ‘개간해야할 땅이 너무 많았던’ 미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 온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가져온 과학적 철학관이 실용주의와 유사하여 일종의 상승 작용을 하며 발전하였다. 참 또는 거짓으로 판단될 수 없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이론은 실용주의가 천명하는 ‘현금가치’로서의 의미 개념과 매우 유사하게 보였다. 이 개념들을 명료하게 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의 자연과학적 방법, 실험주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거대한 경험주의 물결에 합류하였다. 즉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태도가 실용주의 전통에 접합되면서 실용주의가 보다 기술주의적(technocratic)인 특성을 가미하게 되었다. 즉 퍼스나 제임스가 강조하던 공동체적이고 참여적 성격이 개인적 자유와 사적 추구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강조하는 진보적 성향으로 기울었다. 두 번째 시기는 실용주의와 논리실증주의가 뒤범벅되면서 듀이의 해명을 기다려야 했고, 도구주의에서 그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환의 과정에서 실증주의화되고 과학화된 실용주의는 이데올로기의 긴장을 완화하고 나아가 종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실용주의 부활의 단계인 세 번째 시기는 로티의 신실용주의가 중심에 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상황은 사실상 과학화된 실용주의에서 과학주의를 털어버리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 초 인간을 달에 보내면서 과학기술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하였으나 곧 그 부정적인 면이 함께 부각되었다. 삶의 세계를 지배하는 요인들은 과학적 세계관이 요구하는 좁은 의미의 경험적 합리성, 객관성보다 광범위하다. 즉 과학주의가 배제하는 윤리적, 미학적 고려, 제약 없는 표현, 공동체적 협력 등과 같은 보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관념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삶의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곧 실증주의적 사유방식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고, 실용주의는 실증주의와 결별하고 인문학적 ‘이야기’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래 분석철학자였던 로티는 전통적으로 철학이 매달려 온 유일한 진리, 합리성, 선의 추구는 연기를 손에 잡으려는 시도 또는 불의 색깔을 찾으려는 시도와 같이 허망하고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며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현대 철학이 메마른 땅에서 겉도는 이유를 경직된 관념적 질서에서 찾는다. 이들은 철학을 고귀한 추상의 세계에서 끌어내려 우리의 이야기로 되돌리려고 한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로티는 자신이 철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하이데거, 비트겐시타인, 듀이의 맥을 잇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 의미의 철학이 그 수명을 다했다는데 동의하고 대안으로서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 그리고 듀이는 도구적 사유를 제시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철학의 과학화가 철학의 고유한 기능을 포기한 재앙이라는 인식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언어의 추구는 사실상 플라톤의 이상, 실재의 비밀을 열어주는 하나의 진정한 언어라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이고, 로티는 철학의 종언이 사람들을 이런 족쇄로부터 해방하는 문화적 결과를 동반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모든 종류의 사유, 탐구에서 동료 인간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어떤 궁극적 토대,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언명은 바로 자유 진보주의의 천명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신실용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아창조는 진보주의가 우리의 선조들을 취하게 하였던 인간성, 자연권 등과 같은 토대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철학이 이런 본질적인 토대를 추구하는 한, 서양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선언은 유효하게 남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삶을 떠받쳐 줄 어떤 확고한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리라는 ‘데카르트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심리적 불안감은 오랫동안 신학이 인간을 길들이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주입한 것에 불과할 뿐 실체가 없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고전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재해석되고, 현금의 일류 철학자들, 예컨대, 퍼트남, 데이비슨, 굿만과 같은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넓은 의미의 실용주의자로 포함시키고 있다. 이십세기 초의 언어적 전환 이후 철학은 지금 또 하나의 전환 즉 실용주의적 전환을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듀이가 사망한 이후 실용주의는 철학사의 한 구석으로 퇴장하는 듯 하였으나 이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부활이 근대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이원론적 사유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저항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2.
내가 실용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관념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이론을 실천으로 대체하려는 욕구, 동료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대화에 어떤 제약도 없음을 인식하는 것,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관념의 주인이 될 때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은 더 이상 설 땅이 없어진다.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관념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거대한 관념만 옳고 그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예컨대, 레닌이나 히틀러와 같은 광기와 결합할 경우 커다란 재앙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지난 세기에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맑은 정신’의 현실주의자 벌린에 의하면, 이 세계에서 최선의 희망 즉 품위 있는 사회의 건설은 대안에 대하여 명확하게 사고하는 것, 즉 다양한 수단과 목적들 가운데 겸손하게 선택하고 선택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음을 전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품위 있는 사회는 잔인함을 최소화하고 그 구성원들이 인내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회이다. 관념론자들은 덧없고 구질구질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신기루 같은 이상에만 매달린다. 더 나아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까지도 이상적으로 재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상상에 불과할 뿐 인간에게는 현재만이 있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은 현실적으로 죽은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세기 이상 미국사회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해온 실용주의는 당초 실용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폄하하던 유럽에서도 부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퍼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뿐 아니라 기호학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임스, 듀이는 심리학자나 종교학자, 교육학자로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미국화된 아시아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미국적인 것의 정신적 토대는 가장 덜 알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실용주의 연구는 고전 실용주의자들보다는 로티에 집중되어 있다. 퍼스선집을 제외하고는 제임스와 듀이의 주요 저술이 다수 번역되어 있고 로티 번역도 여러 권 나와 있다. 그 외에 루이스, 미드와 같은 실용주의자들은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퍼스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는 한권의 저서(정해창)가 유일하다. 제임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보다는 심리학이나 종교학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고, 듀이에 대한 연구도 단연 교육학 분야가 지배적이다. 철학 쪽에서는 오래 전에 듀이를 학계에 소개한 김태길이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로티에 대해서는 다수의 저서, 역서를 낸 김동식이 단연 두드러지고, 이유선, 엄정식, 노양진, 김혜숙 등의 비판적인 글이 관심을 끌고 있다. 사실상 소수의 학자들만 실용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셈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인문학의 위기가 지속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우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실용주의 연구자가 몇 명 안 된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맑은 정신’으로 보면 인문학의 위기는 관념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인문학자들의 케케묵은 관념을 들어 줄 고객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객을 위해서 새로운 관념을 제시해야 할 일이다. 칸트의 말대로 철학자들은 모두 시시포스이다. 돌(관념)을 굴려 정상에 올려  놓을 때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돌은 영락없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20세기만 보아도 서구의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전환, 언어적 전환, 포스트모던적 전환, 실용적 전환이라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시시포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청중이 지루해 하기 보다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인문학의 르네상스가 펼쳐진 것이다.

철학자들은 기존의 관념이 설득력을 잃어갈 때 끝없는 대체놀이에 의해서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왜 우리가 바윗돌을 정상에 올려놓아야만 하는가라고 회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대한 관념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탐험 정신이야말로 실용주의가 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정부가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 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인문학자들이 돈을 쫒아 헤매고 있는 한, 인문학은 더욱 답답해질 것이다.(정해창/ 한국학중앙연구원·철학)

08.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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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나무 (이메일 보내기) l 2008-02-11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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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신문(07.12.31) 헤이! 리버럴리스트,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시지

  무페의 책 서평 청탁 전화를 받으면서 번역의 적절한 타이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1993년에 출간된 이 철학서적은 바로 2007년 한국의 선거 과정 및 더 나아가서는 참여정부 5년 실패의 핵심을 마치 예언하듯이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특징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ABR’(Anything But Roh)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다수의 유권자들이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는 이른바 ‘회고적 투표’ 양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는 그리 틀린 평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2007년의 노무현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그가 상고출신이거나 자수성가 스타일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가 여의도 바깥의 아웃사이더로서 한나라당을 접수해, 이후 열린우리당 혹은 386으로 상징되는 ‘여의도 특권층’과 선명한 대립각을 형성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농축된 ‘욕쟁이 할머니’ 등의 일련의 정치광고들은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눈물’ 광고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반면 이른바 개혁파의 대표주자인 정동영 후보의 ‘가족 행복 시대’나 ‘개성 동영’은 대립각이 불분명하고 분노를 조직하지 못하는 ‘합의주의적 정치’ 방식의 구현이었다. 그는 이후 뒤늦게 전투적인 리버럴인 문국현 후보의 ‘진짜 경제 대 가짜 경제’ 프레임을 차용했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처럼 어색한 캠페인에 그치고 말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정동영 후보의 이러한 미적지근한 합의주의적 정치는 어떤 측면에서는 그간 5년간 노무현 정부의 부분적 특성을 징후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필자가 경악했던 것은 대통령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천진난만한 기대와 발상이었다. 이는 이후 합의주의적 관점이 강한 울리히 벡에 대한 대통령의 열광, 합의주의 기대의 절정으로서 대연정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반면에 그 강요된 합의주의적 정치의 틈새를 뚫고 홍준표 의원의 부동산 정책 같은 보수적 포퓰리즘이 득세한 바 있다. 


바로 위의 정치지형이 무페가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고민하는 문제의식이다. 무페는 하버마스적인 합의의 정치를 꿈꾸었던 노 대통령이나 정책에서 정치의 적출 수술을 꿈꾸는 매니페스토 운동을 비웃기나 하듯 정치적인 것에서 적대성은 영원히 제거가 불가능한 존재조건임을 강조한다. 그의 문제의식이 빛나는 것은 놀랍게도 파시즘의 이론가 슈미트의 인생에 대한 비관적 통찰을 회피하지 않고 수용하면서도 이를 역으로 자유주의 정치의 활력소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점 때문이다. 그에게 정치의 진정한 역할은 이런 적대적 힘들 간의 헤게모니 투쟁을 자유주의 정치의 틀 자체를 붕괴시키지 않는 활력 있는 ‘경합적 민주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급진 민주주의자인 그의 자유주의 틀에 대한  존중이 많은 이들을 혼돈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가 때로는 모욕적으로까지 들릴 수도 있는 한국의 기이한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필자는 한 학술회의에서 참여정부를 자유주의적이라고 지적했다가 한 정부인사가 보수적 집단으로 매도라도 당한 듯이 정색을 하고 항의를 해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무페조차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다만 자유주의의 경계를 부단히 넓히는 혁신의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더 급진적인 스펙트럼의 지젝 같은 학자는 무페의 시도가 자유주의의 헤게모니에 결국 포섭된다는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의 스펙트럼 넓히기 시도는 자유주의에 대한 제한된 상상력에 갇혀있는 서구나 한국의 자유주의나 좌파 정치진영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페가 하버마스나 롤즈 등의 합의주의적 정치관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것은 그가 대화와 타협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는 집단적 정체성간의 투쟁과, 사실은 냉정한 배제에 기초한 ‘구성된 합의’를 마치 ‘포괄적인 합리적 합의’로 포장하려는 관점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합리주의적 탈정치관의 지배는 의도하지 않는 부작용을 양산한다는 점이 무페의 중요한 통찰이다. 왜냐하면 이들 탈정치적 관점은 적대적 힘들을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시킬 통로를 제시하기보다는 합의주의적 외관 하에 회피하고 억눌러 결과적으로는 의도와 정반대로 다양한 근본주의적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무페는 현재 서구에서 예외라기보다는 흔한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의 만연을 그 대표적 징후로 들고 있다.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은 지젝의 표현처럼 단조롭고 무기력한 합의주의적 자유주의 정치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향락’(jouissance)을 시민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록 뒤틀린 형태이지만 어쨌든 정치의 본래적 힘을 잘 이해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무페는 이 책에서 자유주의 이론들이 대중적 욕망에 근거한 파시즘의 현상을 단지 병리적인 예외로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정치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무페의 이론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만 의미 있는 비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와 한국에서 그 대안으로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공동체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의미를 제공한다. 즉 미국의 에치오니의 공동체주의 운동이나 한국의 공동체 자유주의 운동은 모두의 합의를 선험적으로 전제한 특정한 공동선의 관념을 주창한다.



하지만 무페가 보기에 이는 경합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탈정치적 관점의 변종들이다. 반대로 그는 선험적 공동선의 존재 대신에 상호 헤게모니의 충돌 속에서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경향에 의해 ‘갈등적 합의’(conflictual consensus)를 이루고, 이는 곧 부단히 도전받아 새로운 갈등적 합의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적 과정을 중시한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공동선이란 부단히 추구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소실점”에 불과하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 한국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하는 진보적 공화주의 철학의 공공선 개념과 수렴될 수 있는 지점이다. 호노한 등의 현대적 공화주의 이론은 공동체주의나 전통적인 시민공화주의와 달리 공동선의 선험적 규정이 아닌 민주적 구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호노한은 무페의 구성적 외부의 두려움에 대항하는 시민 공동체의 문제의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호 의존된 시민 간의 동료관계 같은 보다 포괄적 규정으로 한 발 더 이론적으로 진전하고 있다.


결국 이 책에서 무페의 자유주의에 대한 고민들은 서구나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혁신을 풍부하게 고민할 수 있는 무기들을 제공해준다. 특히 최근 자유주의 정치진영이 선거에서 참패한 한국의 맥락은 더 큰 적실성을 가진다. 현실 자유주의의 위기가 역설적으로는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실천적 혁신의 장기적 계기가 될 수 있다. 더구나 탈정치적인 CEO 정치론의 지배력이 갈수록 커지는 한국의 상황은 새로운 이론적 고민의 과제를 던져준다. 무페의 책은 그 성찰의 여정으로의 좋은 입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안병진 / 경희 사이버대·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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