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하룻밤 시리즈
미야자키 마사카쓰 지음, 이영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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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라는 책 제목은, 7년전 마지막으로 세계사 교과서를 덮었던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많은 도표와 그림들이 간략하면서도 흥미있게 정리가 되있다. 또 정성스레 준비된 미려한 역사의 뒷 이야기들은 많이 찾아 볼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되새김질을 하는 나같은 독자에겐 읽기쉽고 그 방대한 <세계사>라는 구덩이의 깊이를 어느정도 가늠케 해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간단한 예습이나 복습정도의 하나의 큰 청사진을 보고 싶어하는 분에게는 좋은 책이지만, 세계사의 <열병>을 앓아보고 싶어하는 독자에게는 큰 도움은 못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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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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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재의 근원에 대한 풀길없는 의문과 삶의 혼돈, 죽음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회색빛 사유들로 지쳐버린바 있던 나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쓰고 지나간 많은 책들과 문학과 사상과 만났지만 잠시의 포만감 후에 다시 허기진 상태로 돌아와 버리는 나에게, 교회의 건조하고 반복적인 메시지와 동화책 같은 수 많은 기독교 서적을 통해서는 채워지지 않던 공허함에 항상 갈증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도스또예쁘스키는 굳게 닫혀있던 나의 가슴의 문을 너무나 쉽게 열어 주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수 있었던 단 한사람의 심리학자'라며 다소 자중된 니체의 찬사만 보더라도, '신은 죽었다'고 외치고 다녔던 그의 지성의 틀에 도스또예쁘스키가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짐작된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영혼과 신이라는 인간 근본의 문제를 심도있게 탐구한다. 딱딱하고 난해한 실존주의적 개념들을 소설이라는 장치로 다양한 인물과 이들이 신을 찾는 과정에서 품게되는 각자의 회의에 대하여 격렬한 장면들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고 흥미롭게 진행시킨다. 인간내면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믿는자와 무신론자간에서 비롯되는 여러가지 갈등들을 각 장에 철저하게 분석하고 압축시켜 빈틈 없이 준비된 그의 입장을 표명한다. 다른 어느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깊이 있고 철학적인 치밀한 묘사로 믿는자들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는 동시에 어째서 모든 신학 이론이 인생의 어려운 문제에 적합하지 않은지를 설명한다. 믿는자들과 무신론자들, 양측의 이론을 팽팽히 대립시키지만 도스또예쁘스키 자신은 어떠한 개인적인 결론도 간단히 내리진 않는다. 마치 기독교의 <자유의지>를 표방하듯이 독자에게 선택권을 전적으로 돌린다.

<대심문관>장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신의 세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무신론자 이반을 통해 의도되는 기독교의 기반을 흔드는 무신론자들의 압권적 논리이다. 믿는자였던 도스또예쁘스키의 이 반론이 어느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의 반론보다 더 뜨겁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 나약한 인간에게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자유를 주었다는 자체부터 과격한 주문이었다며 시작되는 대심문관의 부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강력한 무신론적 표현이며, 이성의 외침이 아닌 가슴의 울림으로 다가와, 믿고 싶어도 이성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반같은 무신론자들의 가슴을 대변해 준다. 또한 스스로 동방 정교회 신도였던 도스또예쁘스키가 자신을 '바보(광신도)처럼 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가르킨 이유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더할수 없는 고뇌가 진하게 베어나며 마치 성자처럼 느껴지는 조시마 장로의 마지막 유언적 언설도 빼놓을 수 없다. '형제들이여, 인간의 죄를 두려워하지 말고 죄에 빠진 사람이라도 사랑하라... 그 전체와 모래 한알, 한알까지 사랑하도록 하라... 그 사물 속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범세계적인 사랑으로 온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조시마 장로가 말하는 영구적인 사랑의 핵심이며, 이반이 간과하고 있는 근본적인 사랑의 의미인 것이다. 결국 도스또예쁘스키가 본 것은 선택의 자유가 있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책임을 지닌 영혼이었다. 조시마 장로의 드라마같은 인생에서 빚어진 그 인생관은 도스또예쁘스키 본인의 것이며, 그것은 누군가 와서 신이 진리 밖에 있음을 증명하고, 진리가 신 밖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도, 진리보다는 신편에 머물겠다는 그의 확고한 의지이다. 어떠한 사상의 아첨꾼도 영혼의 현자보다 쓸모 없다고 말해 주는듯하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안고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디선가 읽었던 '알면 사랑한다'는 구절같이, 무조건적인 옳고 그름을 떠나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려하면 진정 사랑할 수도 있다는 간단한 이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는 이 한권의 책이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여러분들의 그 기나긴 행로에 튼튼한 지팡이 역할을 할 수 있음에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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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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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는 흔히 도스또예프스키, 카프카, 카뮈와 더불어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 분류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화를 통해 유도 되어지는 우리 삶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전락, 고통, 죄의식, 절망감이라는 주제들은 실존주의 그 자체이다. 베케트는 이 작품을 통해 우연히 지정된 시간과 공간속에 그냥 던저져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며 '왜 하필이면 지금 여기?'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연과 무의미라는 인생의 장면들을 희곡이라는 형태로 연출해내는 베케트의 창조력은 과히 눈부시다.

두 주인공이 생각없이 뱉어내는 듯한 대화속엔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으라는 베케트의 도전이 역력하다. 출생이라는 시작부터 선택권이 없으며 원하지도 않는 이때 이곳으로 던져진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인식, 죽음과 출생의 순환을 통한 무의미한 존재의 반복의 불가해등 베케트가 보는 세상은 혼란스럽고 엉터리같으며 무의미하다. 우리 인생은 불공평하며 모든 사건은 근거가 없어 보인다. 이런 현실에 베케트가 보이는 반응은 <침묵>이다. 그는 극중 간간히 인물간에 침묵을 야기시킴으로서 우리 개개인내의 혹은 인간들간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직접 드러낸다.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찾고 헤메이는가라는 베케트 자신의 개인적인 방황을 침묵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또 예수가 이 세상에 와서 받은 십자가에 못박힘의 고통은 우리 모두가 세상에서 매일 받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이 순간적이고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안된다는 에스트라공의 의문은 도데체 신의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베케트의 신의 존재에 대한 거리낌없는 의심으로 해석된다. 파괴적인 인간본능, 무의미한 폭력등으로 얼룩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베케트가 정의한 세상은 <고통>이었으며 균형과 평화가 없는 세상에 절대자의 위치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 당시와 같이 인생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해 보일때, 또 종교라는 자기 인생에 정의를 부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 그 공허함과 무료함은 배가 되었을테니.. 베케트의 절망적 우울함을 교감할 수 있다.

<고도>는 베케드 자신이 밝힌데로 그가 믿지 않는 불투명한 신보다는 누구의 인생에서나 분병한 단 한가지... <죽음>이라는 끝을 말하는게 아닐까 생각된다.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 이 엄연한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일때 죽음이 우리의 가장 진정하고 의미있는 계기이며 직접 체험할수 있는 나의 개인적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죽음의 불안과 인생의 보잘것 없음에서 <해방>되서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것... 이것이 베케트가 말하려는 <고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급기야 베케트는 그 죽음을 기다릴수 있는 여유를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시대에 대한 불안감이 어떤 낭만으로까지 받아 들여지고, 주체없은 반항만으로는 일들이 해결될 수 없는 때이기도 하지만, 극심한 경쟁체제의 현대사회로서 각 개인이 좀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책임과 자유와 근원적인 존재론적 불안감과 맞닥뜨려야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실존주의적 감수성은 오늘날 더욱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런 시간의 초월성을 갖춘 철학책들에 계속 나의 손이 가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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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지혜 : 전편 - 지혜의마당 1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박민수 옮김 / 아침나라(둥지)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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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이 이성을 완전히 사용하게 되는 시기는 지혜의 관점에서 대략 60대라고 설파했다. 자신이 남길 유산에 대해서나 생각해볼 나이인 60이 되어서야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를 겨우 터득하고 바로 죽어야 하다니 우리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이성의 실체를 갈망하며 항상 그곳을 보려 노력하지만 결국은 감정의 유혹에 미소를 짓는것이 인간이니 참으로 그 모습이 더욱 초라하다. 인간답게 사는 삶과 행복에서 완성되는 <성자>의 모습... 이것이 그라시안이 말하는 이성이라는 월계관을 쓴 <승자>의 초상이다.

이 책은 400년전이라는 오랜 세월의 저 편에서 쓰여진 것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묵은 시대의 곰팡내가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읽다보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가 있다. 또 이성의 프리즘을 통해 투영시키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분석력은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해 주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악하고 이기적이며 변덕스럽고 허영심의 가득찬 우리 인간의 본성을 밑바닦부터 파헤치고 그러한 인간이라는 존재와 어떻게 교제를 해야할지 구체적인 충고를 던진다. 항상 노력해도 인간관계에서 결국 얻는 그 실망을 줄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나 할까? 여러 수도학교의 교사로서 군대의 목사로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친 당대의 사표였던 그의 깔끔한 강의를 듣는 느낌이다.

가파르고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양제같은 글들이었다. 개인적으로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면 <더불어 사는 세상>일진데 그라시안이 말하는 그렇게 지극히 이성적이여야할 우리의 초상에다 비완벽에서 나오는 인간의 자체에 대한 이해와 또 너그러움과 훈훈함과 같은 비기계적인 한 생명으로서의 요소도 잊지 말라는 그 한마디의 끝맺음이었다. 항상 이성으로만 사는것이 이상적인 인간의 풍경일지는 생각해볼 만한것 같다. 표지판이 있어도 다른길을 택하는 우리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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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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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은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무모하고 위험하며 치명적인 사랑의 종잡을 수 없는 질주를 자주 발견한다. 때론 그 질주의 주인공이 되어 맹목의 드라이브를 감행하기도 한다. 잘못될 운명에 얽혀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사랑인가? 개츠비의 사랑도 생의 출구가 아닌 종착역으로 그를 내몰고 가지만, 피츠제랄드가 굳이 그에게 '위대하다'는 형용사를 달아준 이유는 아마도 그 사랑 때문이 아닐까?

피츠제랄드는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경제공황 직전의 떠들썩 했던 1920년대의 미국의 모습을 우리앞에 되돌린다. 그는 개츠비가 한 평범한 젊은이로 출발하여 성공한 사업가로 스러지기까지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를 기회의 제도라 정의한다. 또 사치스러운 화려함, 부도덕, 불미스러운 거래등을 통해서라도 한 인간이 지닌 삶의 희망과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는 그 뒤틀린 사회를 주시한다. 하지만 개츠비에게는 삶의 목표 뒤에 가려진 사랑이라는 이유와 동기가 있어, 그는 오히려 풍족한 희생자였고 그의 생은 아주 이상적인 비극이었다.

개츠비가 보여준 사랑은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의 초현실적 낭만과 환각적 순수로, 요즘 세대의 초고속 사랑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절실함과 애절함의 벽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 보다는 허무함, 안타까움 보다는 냉소라는 반응이 앞서기도 했을 것이다. 또 수 많은 상징적 표현과 그만의 간결하고 날카로운 문장력으로 알려진 피츠제랄드의 문체가 고스란히 변역되어 그 글의 향기가 우리의 온몸 가득히 퍼지는 일도 쉽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인생의 테마로 장식된 20세기의 이 고전은 사랑이라는 끈으로 이 세상에 얽매인체 방황하는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생에서 다시는 되돌릴 수 없고 그래서 잊지 못하는 그 <순간>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우리의 <추억>의 한숨소리로 다가온다.그리워 할만것들은 언제나 왜 그렇게 신속히 사라져 가는 것인가... 어쩌면 사라져 버려서 더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리움은 다시 찾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 가슴에만 담아 두어야 할 것 인가보다. 피츠제랄드가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에서 밝히듯이, '... 그렇게 우리는 과거 속으로 끊임없이 밀려가면서도, 흐름을 거스르며 배를 띄우고, 파도를 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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