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9
앙드레 지드 지음, 오현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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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았던 일들도 시간이 흐르고 보니 점점 무뎌지고 그럭저럭 살만해졌거든요. 그 같은 일들을 몇 번 반복 경험해서 그런지, 언젠가부터는 힘든 상황이 닥쳐도 나중 되면 괜찮아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꼭 문제를 해결해서 좋아지는 것만은 아니에요. 인간은 도무지 손쓸 방법이 없어 질질 끌고만 있는 상황 중에도 곧잘 적응하기 때문이에요. 해결도 않고 딱히 덮어둔 것도 아닌 고민거리들은 어느새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지만 아주 한 번씩 따끔거릴 때가 있을 뿐이죠. 잊고 살다가도 꼭 한 번씩 나를 찌르는 그 가시의 이름은 ‘미련‘이 아닐까 합니다. 미련은 ‘끝났음을 인정하지 못해 과거에 머무는 마음’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 말처럼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은 우리를 과거 어느 시점에 묶어놓고 거기까지가 자신의 한계라 믿게 만들죠.


앙드레 지드가 쓴 <좁은 문>은 금지된 사랑이라는 해결 불가한 문제를 징하게도 길게 끌고 가는 작품입니다. 사촌지간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데, 왜인지 알리사가 제롬을 자꾸 거부해요. 딱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두루뭉술하게 만 둘러대면서 거절합니다. 최대한 보지 말자면서 그놈의 편지는 맨날 쓰는 거 있죠? 솔직히 이 정도면 정신병이라도 해도 할 말이 없어요. 사정이 있건 없건 말을 안 해주니깐요. 아무튼 제롬은 완강한 태도의 그녀가 요구하는 거리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밀어냈으면 포기할 법도 하건만 사랑에 빠진 남자의 순애보란 그리 말처럼 간단한 것도 아니걸랑요. 그래서 두 사람은 요즘 표현으로 ‘랜선 연애‘만 하는 사이가 돼버렸습니다.


그녀의 사정은 대강 이렇습니다. 교회에서 ‘좁은 문‘에 관한 설교를 듣고,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 어떤 걸림돌도 있어선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은 제롬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그를 향하는 마음이 행여 구원의 길을 막는 꼴이 될까 봐, 둘이서는 그 좁다란 길을 지나가지 못할까 봐 끝까지 혼자이기를 선택한 거죠. 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매우 깊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의 해석과 판단이 왜 정답이라고 밀어붙였는지가 참 의문입니다. 목사님한테 가서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혹시 왜곡되게 해석한 건 아닌지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싶더군요. 허나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았던 것은, 바람 나서 떠나버린 모친에 대한 상처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사랑의 종말을 목도한 그녀의 입장에서 깊은 사랑의 발전이 겁나기도 했을 겁니다. 다만 그러한 속내를 제롬에게는 말해줬어야죠. 그게 어려우면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내던가요. 말이 금지된 사랑이었지 내가 갖긴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정말 이기적인 태도였습니다. 마치 결혼을 계속 미루면서 결혼 적령기인 여자의 시간을 잡아먹는 못된 남자들의 얘기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제 사랑을 굽힐 맘이 없는 제롬이 그닥 멋져 보이진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사랑에 도전하고 작게나마 희망을 걸었다지만 사실 그도 알고는 있었을 거예요. 자신이 꿈꾸고 바라던 그림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을 거라고요. 저라면 크게 싸웠을 거예요. 나를 그렇게까지 밀어내면서 희망고문은 왜 하느냐고 말이죠. 그 역시 혼자서 답을 찾느라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을 겁니다. 알리사가 그랬듯이 제롬 또한 자신의 판단에 왜곡이 생기게 되었죠. 어쨌거나 제롬은 그녀의 원인 모를 입장을 지지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삶의 전부가 그녀를 위한, 그녀에 대한, 그녀로 인한 이유들로 움직여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뭘 어쩌지도 못했으니까요. 세월이 훌쩍 지나서도 여전한 그의 미련들은, 어쩌면 그를 살아가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도 붙들고 있다는 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서일 거예요. 나를 좀먹기까지 하는 그 아픈 기억들은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놀라운 변화를 불러올 겁니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아주 흉한 몰골로 지낼 수도 있겠습니다만, 각자의 ‘좁은 문‘을 통과한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래요, 어쩌면 나와 당신의 ‘좁은 문‘은 누군가에게 물어서 확답 받을 수 있는 게 아닐 테죠. 결국은 자신이 그 의미를 파헤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 겁니다. 설령 그릇된 해석이었다 해도 그게 맞았다고 박박 우기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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