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리커버 에디션)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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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시간과 건강이 있지만 돈이 없어서 힘들고, 커서는 돈이 있어도 건강과 시간이 없어서 힘들다고 합니다. 과연 옛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는 듯하네요. 물론 저는 건강, 시간, 돈 전부 다 없지만요. 아무리 운동을 하고 몸 관리를 해도 체력이 좋아지는 건 모르겠고요, 그래서 줄곧 해왔던 독서가 더 이상 취미처럼 느껴지질 않는 달까요. 이럴 거면 차라리 벽돌책이나 읽자 싶어 고른 에밀 졸라의 작품을 무려 한 달도 넘도록 붙잡고 있더랬습니다. ‘루공-마카르 총서‘를 뽀개기로 한 이상 언젠가는 읽어야 했을 책 들인데, 여전히 졸라의 작품은 선뜻 도전하기가 버겁습니다. 그나마 이번 편은 재미있어서 다행이었죠.


전작인 <집구석들>에서 옥타브 무레가 그렇게 이 여자 저 여자를 찔러보고 다니더니, 과부였던 건물주와 재혼했더군요. 이 작품에서는 죽은 아내의 백화점과 유산을 남편인 무레가 물려받았다는 설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업 감각이 남다른 무레 사장님은 인근 상가들을 집어삼키며 백화점 몸집을 마구마구 키워나갑니다. 이 때문에 주변 자영업자들은 백화점에 손님을 다 뺏기고 서서히 죽어나갑니다. 동네에 대형마트가 생기면 구멍가게들은 자연히 망하는 구조였죠. 그리하여 상인들은 백화점과 관련된 모든 것을 원망하고 저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여유 부릴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고요, 점점 손가락 빨 수조차 없게 된 상인들은 전부 백화점의 횡포에 무릎 꿇어야만 했습니다.


바깥 사정은 대략 이렇고요, 이번에는 백화점 내부를 들여다봅시다. 먼저 이 작품의 주인공인 드니즈 보뒤가 이 백화점에 판매원으로 입사하게 됩니다. 고아인 그녀는 두 남동생과 함께 큰아버지 집으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요, 문제는 상인인 큰아버지도 백화점 때문에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기에 형편 따질 때가 아니었어요. 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간 백화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직원으로 지냅니다. 초라한 행색, 부족한 사회성, 출생지와 성장 배경 등의 이유로 드니즈는 직원들 사이에서 은따를 당하는데요, 여기에 철없는 남동생이 툭하면 찾아와 돈을 빌려 가서 아주 죽을 맛입니다. 몇 달이 지나도록 돈은 모이질 않고, 인간관계는 좋아질 낌새가 전혀 없었죠. 이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 초 까칠한 사장님이 웬일로 측은지심을 가져줍니다. 하지만 여론 조작에 의해서 결국 드니즈는 퇴출 당해버려요. 역시 에밀 졸라에게 드라마 따윈 있을 수 없나 봅니다.


이 작품은 인물 서사 말고도 백화점의 역사와 기능을 꽤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머리가 비상했던 무레 사장님은 직원마다 특별수당을 할당하여 매출을 높이고, 판매원들 간에 경쟁심과 충성도 마저 손쉽게 끌어올립니다. 추가로 무리인듯한 경영 방침도 고객들의 욕구 충족을 이용하여 거뜬하게 진행시킵니다. 또한 손수 나서서 매장별로 위치를 재배치하여 고객들의 계획 없던 소비를 끌어내는 등 아주 타고난 사업 센스를 발휘합니다. 게다가 인근 상가들을 흡수하여, 이제 옷가지만이 아니라 온갖 잡화까지 판매하는 일종의 에덴동산이 돼버렸죠. 오늘날에는 쇼핑몰, 식당, 서점, 극장, 놀이터가 전부 모여있는 백화점이 흔하다지만, 19세기의 초기 백화점을 생각해 본다면 가히 기가 막힌 아이디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새로운 제도가 생겨날 때마다 직원들은 죽어나갔지만요.


자, 다시 거리로 쫓겨난 주인공에게로 돌아옵시다. 드니즈는 차마 큰아버지한테 되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하여 아직 버티고는 있는 상인들 집에서 직원으로 일하며 숙박을 해결합니다. 허나 그녀 눈에만 훤히 보이는 큰 문제가 있었어요. 주변 상가들이 지금 같은 사업방식을 계속 고집하면 전부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점을 조심히 사람들에게 조언해 주었지만 다들 들어먹질 않았죠. 자기네들은 절대 틀리지 않았고, 오히려 악마 같은 백화점 쪽이 문제라면서요. 짧게나마 백화점 짬밥을 먹었던 드니즈는 돈의 구조와 산업 시장의 변화를 목격했고, 이 거대한 흐름은 절대 막지도 바꾸지도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속앓이를 참 많이도 했습니다. 백화점을 욕하는 이들에 대한 이해와, 시대의 변화를 인정치 않으려는 그들의 아집 사이에서 홀로 근심하는 그녀를 보며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깥사람이 된 드니즈도 왜인지 자신을 쫓아낸 백화점 편을 들고 있었다는 건데요. 혹 나였다면 내 가족과 친지들의 살을 다 파먹은 적군을 옹호할 수 있을까 싶네요.


바깥 생활에 한계가 다다를 즈음, 그녀에게 동아줄이 내려옵니다. 드니즈를 좋게 보았던 사장님의 권한으로 재입사를 시켜버리죠. 역시나 여론은 좋지 않았지만 그녀는 일에 대한 열정과 온화한 성품으로 모두를 바꿔놓았습니다. 몇 년 뒤에는 거의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고, 연달아 승진하는 쾌거를 거둡니다. 근데 이쯤부터는 바깥 상인들의 얘기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좀 아쉽더군요. 반대로 그녀를 향한 사장님의 추파가 주 내용을 차지합니다. 사실 무레의 플러팅은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주인공이 계속 거부했었고 이후로도 계속 거부합니다. 신분의 격차가 너무 커서 그렇다지만 솔직히 드니즈의 입장은 따로 있죠. 가족과 바깥사람들을 쫄딱 망하게 한 장본인과 어떻게 지지고 볶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속내를 모르는 주위에서는 그녀가 밀당 중이라는 오해가 퍼집니다. 가면 갈수록 사장님 체면은 구겨지고 바닥을 치고요. 이제껏 내가 점찍은 여자들은 죄다 넘어왔는데, 내 눈에 들어보겠다고 그토록 난리들이었는데, 어째서 그녀는 이 완벽한 나를 마다하는가! 그렇게 천하를 얻고도 한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해 울부짖는 무레의 인생 제3막이 열렸습니다.


무레의 끝없는 플러팅에 지친 그녀는 자진 퇴사를 선언합니다. 근데 이 지경이 오기 전까지, 무레의 나르시시즘과 오만함은 거의 다 치유된 상태였어요. 그의 변화를 일궈낸 장본인이 드니즈였기에, 주변에서도 그녀의 퇴사를 극구 말리곤 했습니다. 은따를 당했던 입사 초기의 그녀를 생각하면 과연 인간승리 아닌가요? 웬일로 저자가 이런 따스함을 넣었나 몰라요. 아무튼 드니즈도 꽤 오래전부터 사장님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쯤 되니 자기가 쭉 밀고 왔던 캐릭터에 잡아먹혀서 할 수 없이 거절하는 게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제 생각이 맞는다면 여태 보여준 그녀의 정직함과 올곧음에 그래도 어울리는 결말이다 싶고요. 여기서 대 반전. 갑자기 사장님 품으로 뛰어들면서 사랑한다지 뭡니까?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아니, 그럴 거면 퇴사 선언은 왜 한 걸까요? 게다가 바깥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어디로 간 걸까요? 이미 분량 초과였던 모양인지, 결말에 대한 아무런 빌드 업도, 보충 설명도 없어서 황당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백화점 안에서 발생하는 직원들의 착취와 따돌림 같은 내용들이 메인 테마일 줄 알았어요. 그런 게 아니면 백화점에서 생겨날 이야기라 해봐야 뭐 얼마나 특별하겠어요? 따라서 고딕소설이나 그 비슷한 장르를 기대했는데 갑자기 러브스토리로 턴이라니. 쩝. 대부분 예측 가능한 전개라서 별 맛은 없지만, 어쨌거나 여인들의 욕망에 대해서는 실컷 구경했습니다. 혹시나 여성들을 까내려고 쓴 작품이라 할 독자는 제발 좀 없었음 좋겠네요. 요즘 대한민국에는 ‘방방봐‘가 안되는 사람들이 진짜 너무 많아서요. 부디 건강한 독자들이 됩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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