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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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슈비츠는 처음 만나는 작가인데 유대인의 핏줄을 이은 독일 출생이라는군. 이분도 정체성에 대해 꽤나 마음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같은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인 <여행자>는 읽는 내내 안쓰러움의 연속이었다. 내용은 딱히 별게 없다. 독일에서 자라난 유대인 주인공이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는 내용이다.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해가고 있었고, 어느덧 주인공 질버만의 집에도 무리가 들이닥쳤다. 가까스로 도망친 그는 사업 동업자인 친구를 찾아가 보지만 배신당하고, 자기 지분의 돈을 받은 뒤 떠돌이 신세가 된다. 식당, 커피숍, 숙박시설 등등 어디를 가보아도 유대인들을 꺼려 하는 분위기였고, 도처에 있는 돌격대원들로 인해 마음 둘 곳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주인공의 외모가 유대인스럽지 않다는 거였다. 다른 동포들은 얼굴에 그 특징이 바로 나타나 잡혀가기 일쑤였지만, 질버만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 아리아인의 인상에 가까웠다. 그 덕분에 유대인이면서도 당당히 바깥을 돌아다녔고, 붙잡히지 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다는 점과 언제 신분이 들통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신을 옥죄어왔다. 하여 그나마 안전한 열차 속에 몸을 숨겨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자가 되는데, 갈수록 커지는 불안에 못 이겨 국경을 넘기로 결심한다. 어찌어찌해서 벨기에로 넘어갔지만 곧 발각되어 다시 독일로 추방당하는 수모도 겪는다.


끝날 때까지 내내 이런 식이다. 도망치고 좌절하고, 편집증에 시달리고 다시 도망치고의 반복. 어쩐지 코맥 메카시의 <로드>가 생각나려 한다. 목적지가 없는 곳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운명을 걸어야만 하는. 질버만이 만나는 사람들도 각양각색이다. 당원으로 활동하는 독일인 중에도 선한 양심을 가진 이가 있었고, 유대인을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이도 있었다. 또한 같은 유대인이면서 마음을 열지 않고 적대감을 표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뭐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었지만, 질버만의 이중심리에는 막 편들어주기가 어려웠다. 저가 유대인임을 자각하면서도 독일인의 혜택은 받고 싶어 하고, 유대인의 고통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처럼 여기는 모습들이 말이다. 닥쳐오는 시련과 죽음 앞에 장사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좀 거시기했달까.


그런 이중성보다는 나치의 만행과 피해자들의 공포를 나타내려 한 작품이기는 하다. 어느 날 일순간에 사업이 망하고, 집을 빼앗기고, 가족들과 흩어지고, 도움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면 나라도 무너져버릴 것이다. 사실 주인공에게는 외모의 장점을 살려 유대인이 아닌 척,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사기꾼 기질이 없음을 알고 정직하게 사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제삼자가 보기엔 선하고 의롭다 할 구석이 별로 없었다. 갈수록 침착함을 잃고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을 반복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극한의 상황에서 나오는 인간성을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이었고, 또 한 번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님은 열린 결말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별점은 높게 못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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