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절 - 어떤 역사 로맨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왔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늘 밝고 명랑했던 친구들도 세월 앞에서 소용없지 않았던가. 직업, 신분, 학벌, 나이, 성공 등 모든 조건을 막론하고 세상에 즐거운 사람, 걱정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여 이 같은 사회에서는 매사에 긍정적이기보다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건강한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을 지키는 것이 모진 풍파를 이겨내는 비결이라 하겠다. 이것은 고통과 불안뿐 아니라 지루함과 권태까지도 막아준다. 물론 이게 가능해지려면 본인만의 사랑이 충만해야 한다. 그 사랑이란 내 주변과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자기만의 시선과 방식이다. 이 점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입버릇처럼 세상을 탓하고 불평불만을 일삼게 되어있다.


어쩌다 보니 특정인들에게 팩폭을 한 것 같은데, <임신중절>을 읽으면서 형편없는 스스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단 브라우티건 작가는 살짝 난해한 글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 이 작품이 쉬운 편에 속하는데, 메시지를 넣은 건지 만 건지 아리송한 챕터가 참 많았다. 요약하자면, 한 여자가 도서관 사서와 동거 중에 임신해서 낙태수술하러 떠난다는 내용이다. 지극히 평범한 서사여서 인사이트가 많지는 않았는데, 나님은 두 남녀의 자기해방에 대해서만 적어보겠다.


남자는 도서관의 비좁은 방에서 지내며 24시간 365일을 근무하는 사서이다. 그곳은 출판이 불가한 책들을 기증받는 특수한 도서관이었고, 그곳을 혼자 3년 넘게 지키는 중이었다.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 외출 한번 못해봤지만 그는 퍽 만족해했다. 어느 날 밤, 한 여자가 도서관을 찾아와 고충을 털어놓다 그만 남자에게 반해버린다. 그녀는 매혹적인 마스크와 다이너마이트 바디를 소유한, 그야말로 초절정 절세 미녀였는데, 정작 자신은 그 완벽한 육체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만을 따지던 남들과 달리,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해준 사서에게 마음을 뺏겼다는 게 어쩐지 디즈니에서 잘 써먹는 전개였지만 그냥 넘어가자.


여자는 동거로써 자기혐오를 극복하기에 성공한다. 이제 남자와 함께 중절수술을 받으러 갈 건데, 문제는 도서관 지박령인 그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거였다. 저 혼자 근무해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지만, 사실 바깥을 나가기가 부담스러웠을 테지. 이렇듯 세상과 마주하는 일을 피해왔던 두 사람. 그 두려움을 깨뜨리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먼저 남자부터 설명해 보자. 남자는 딱 우물 안 개구리였다. 우물 속에서 지낸 지가 오래되어 우물 밖의 세계가 궁금하지 않은 상태다. 그랬던 그는 여자의 중절수술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물 밖을 나오게 된다. 좋든 싫든 탈출에 성공한 셈이니 한 단계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남자가 개구리라면 여자는 새장에 갇힌 새였다.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 ‘육체‘라는 새장에 갇혀서 나는 법을 잊어버린, 자기가 아름다운 줄도 모르는 한 마리의 새. 모든 남자들에겐 추파를, 모든 여자들에겐 질투를 받고 살아온 여자는 사서 덕분에 새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갖은 시선을 피하고자 제 육체 속으로 숨기 바빴던 여자는, 이제 자신의 육체를 보는 법과 세상을 대하는 인식을 알아간다. 오히려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세상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니, 이 역시도 한 단계 성장한 셈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계기로 각자의 감옥에서 해방되고 위기와 불행을 극복해낸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품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온몸으로 부딪혀서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던 헤세의 말처럼 자기해방에는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자신의 충만한 사랑에 이른다면 우리는 우물 밖으로, 새장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모든 풍파를 이겨내는 평온함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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