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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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구매했었는지 기억도 없는 <호텔 뒤락>을 읽었다. 솔직히 그저 그랬는데 빼어난 해설 때문에 별 넷을 주었다. 정녕 이보다 잘 쓰진 못하리라 생각될 만큼 훌륭한 분석이었다. 하여 자신 없어진 나님은 최대한 해설과 겹치지 않는 선에서 평을 적어보겠다. 소설가 이디스는 어떤 불명예를 안고서 호텔 뒤락에 피신해있는 중이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고통을 달래고 글쓰기로 멘탈을 회복할 예정이며, 여성들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살펴보게 된다는 작품이라나.


호텔에 있는 동안 글이나 쓰겠다던 다짐이 무색할 만큼 집필은 진전이 없었다. 단조로운 삶의 권태로 무기력해진 이디스 앞에 나타난 사업가 네빌. 그녀의 선입견과 페르소나를 들여다본 그는 많은 조언을 건넨다. 그녀는 자신이 이성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남들처럼 사회적 제도와 규율에 억지로 자신을 밀어 넣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믿는 듯했다. 이디스의 억눌린 무언가를 본 네빌은 그녀의 관점을 바꿔보도록 권한다.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끌려다니지 말고, 감정의 과잉에 속지 말고, 좀 더 유연한 자기중심적인 삶을 습득하라면서. 사회와 관계를 정하는 잣대가 강하다 보면 자꾸 선을 긋게 된다는 거였다. 과연 그 말대로 이디스는 남들을 자기 입맛대로 속단하는 경솔함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소설가라는 직업병이 한몫했을 테지만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몹쓸 버릇임에 틀림없었다.


나님은 불순함의 감지센서가 고도로 발달한 탓에 남들과 허물없이 지내기가 참 쉽지 않다. 특히 예상대로의 모습들을 볼 때마다 그 선입견들은 더욱 확신을 갖게 된다. 그렇게 이것저것 재고 따지다가 내려놓지를 못해 매번 고립돼버리는 것이다. 또 나처럼 고립된 사람들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 세상은 온통 병자, 환자들로만 차고 넘치는 지옥처럼 느껴지게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부정적인 속내와 태도를 고수하게 된다는 말이다. 내가 볼 때 이디스는 나와 다르지 않다. 지난날의 잘못과 더불어 유배지나 다름없는 호텔 생활, 상대하기 피곤한 타입의 호텔객들. 여러 요소들이 그녀를 무대 밖으로 밀어내었고, 거기에 이디스도 저항 없이 끌려다녔다. 네빌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해 준 것이다.


이어서 대답한 이디스의 발언이 충격적이다. 자신은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면서. 주변과 딱 필요한 만큼만 관계를 유지하고 절대 거리를 좁히는 법이 없는 그녀의 속 사정은 누구보다도 사랑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 한 말은 에로스적인 사랑을 뜻했으나 더 넖게는 아가페와 플라토닉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디스의 과제는 도덕적 기준의 벽을 허무는 법을 익히는 것일 테다. 하나 네빌은 그것보다는 사랑 자체에서 벗어난 모습이 되는 게 먼저라고 하였다.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이디스는 제 사랑이 커지는 대로 놔뒀다가 그 부피에 못 이겨 무대 밖으로 밀려났다. 따라서 사랑의 부피를 줄여야만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이다음엔 뭐 어떡하라는 걸까? 결혼을 해서 사회적 지위를 갖춰야 한단다. 그 말은 결혼 자체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넓은 세계로 뛰어들라는 의미였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이디스의 과거로 넘어간다. 그녀는 어느 유부남과의 금지된 사랑을 즐기고 있었지만 현실을 직시한 뒤 홧김에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한다. 그리고 문제의 결혼식 날,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상태에서 그녀는 결혼식에 불참한다. 이디스의 평판은 그야말로 곤두박질을 쳤고, 본인 스스로도 용납이 안되어 죽을 맛이었다. 그 사건은 유부남을 못 잊어서라기보다 자신이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어딘가에 종속된다는 것과는 맞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살던 곳을 떠나와 이 구석진 장소의 호텔까지 오게 됐던 것. 그래 뭐, 도망친 건 그렇다 치고 다시 복귀할 수나 있는 지가 더 궁금하던데.


솔직히 이 정도 가지고는 좀 약하다 싶었는데 웬걸, 페미니스트를 호되게 질책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 책이 84년도에 나왔으니까 지금과는 다른 유형을 말하는 것일 테지. 호텔에는 남자들의 시중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고 즐기는 콧대 높은 여성 객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손님으로서가 아닌 여성으로서 그 특권을 누리는 중이었고, 이것이 남자들에게 쉬운 표적이 된다며 불명예스럽다던 이디스의 한탄이 쏟아진다(170p). 그러는 한편 네빌과 붙어지냈단 이유로 이디스도 쓸만한 남편감을 노리는 속물처럼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중에서 그녀가 닮았다고 하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현대 여성의 홀로서기에는 남성의 그늘을 벗어날만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렇듯 이디스도 고유의 것으로 자립하고자 해왔으나 그녀 또한 여성으로서 기대고 싶어 하는 이중성을 떨쳐내진 못하였다. 아마도 이 점을 시사하기 위해, 또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 쓴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자, 그러면 이디스를 비롯한 현대 여성들은 이대로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해야 되느냐면 그런 게 아니다. 안팎으로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지키는 선에서의 관계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하여 저자는 주인공을 네빌과 맺어주어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자 했다. 아직도 그녀는 유부남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상태이고, 네빌도 이디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이유를 납득했기에 결합이 가능했다. 이렇듯 남녀의 다른 조건과 형편을 존중하는 것이 올바른 공정이지만, 오늘날에는 생리적 차이를 배제한 동등함을 공정이라고 보고 있다. 과거 작가들이 강조한 페미니즘의 진보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호텔에서의 생활이 유배생활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것은 속해있던 사회와의 단절을 뜻했지만, 돌아갈 곳을 잃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나를 받아줄 이가 없다면 그곳이야말로 유배생활이 아니고 뭐겠는가. 아무튼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자립의 조건 또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현대 여성의 자립에는 돈과 방의 필요성을 말했었다. 바글바글한 인간들 사이에서 개인 공간이 필요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공간이 넘쳐나고 오히려 북적이는 데를 직접 찾아가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자립 조건에는 타인과 연대하는 인간관계의 능력과 기술이 포함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저자의 인터뷰 중에, 성공을 거머쥔 고아로 살기보다 여러 자식을 낳은 엄마로 살고 싶다는 얘기가 있다. ‘자율성의 필요‘와 ‘관계의 필요‘가 갈등관계가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두 가지가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하나에만 집중했으니 결여된 것에 공허를 느끼는 건 당연하다.


실로 이디스는 자신의 커리어를 택했지만 사회로 뛰어드는 데에는 꽤나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혼인을 막 결사반대하는 쪽도 아니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환상을 쫓고 있는 주인공. 이런 이디스가 글쓰기로 도피했다고 하는데, 정작 소설 집필은 손도 안 대고 가끔씩 편지 작성이나 하는 정도를 도피였다고 볼 수나 있나 싶다. 암튼 피곤해서 여기까지만 쓰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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