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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박 ㅣ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평점 :
읽는 게 느린 나님조차 반나절 만에 다 읽은, 말 그대로 페이지 터너인 작품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인사이트를 도출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솔직히 지금 뭘 적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써보겠다. 저자 슈니츨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법을 토대로 글을 쓴 작가라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한밤의 도박>에서도 심리 묘사가 잘 드러나는데, 작가 이력을 보니까 병원까지 개업한 의사 출신이어서 더 놀랬다. 지금껏 내가 보아온 사자 직업군들은 감성이 메말라서 섬세한 표현에 참 서툴다는 인상만 받았거든. 그런데 슈니츨러한테는 그런 닭 가슴살의 감성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유대인의 핏줄 덕분이 아닐까 싶다. 아님 말고.
육군 장교 빌리는, 민간인이 된 옛 동료에게 돈 좀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리 친하지도 않은 데다 자기도 거지면서 기꺼이 돕겠다니 참 이해가 안가지만, 한창 테스토스테론이 넘칠 나이의 수컷들은 어떻게든 가오를 잡으려 한단 말이지. 초장부터 객기 부리는 걸 보니 결말이 뻔해서 김빠지긴 했는데 그래도 재미있었다. 빌리는 노름판에 가서 돈을 잃고 따내길 반복하다가 빚쟁이가 된다.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은 돈을 주지 않았고, 외삼촌이 흘린 정보를 따라 있는지도 몰랐던 외숙모를 찾아간 주인공. 놀랍게도 외숙모는 언젠가 자신이 즐겼던 원나잇 상대였던 것. 이제는 성공한 사업 투자자가 되어 빌리의 거만한 콧대를 꺾어버리는 그녀. 내일까지 빚을 갚지 못하면 군에서 잘린다는 사정 앞에 외숙모는 알 수 없는 웃음만 짓는다. 예나 지금이나 정신 나간 것들은 금융 치료가 정답이란 말씀.
빌리는 나름 건실한 청년이었다. 대대로 군인 집안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품위를 생각할 줄도 알았고, 씀씀이도 전혀 헤프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출처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그를, 마치 타고난 럭키가이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근본 없는 믿음과 신념으로 냅다 뛰어든 노름판에서 운 좋게 거액을 몇 번 거머쥐기도 했다. 동료와 자신한테 쓰고도 남아돌 만큼의 돈을 따자, 냉정히 물러날 생각도 했던 빌리의 모습은 꽤나 쿨가이 다웠다.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행운이 반복되면 이 운발이 어디까지 닿을지 알고 싶어지는 법이다. 하여 기어이 그 끝을 확인해야만 멈추게 되는 것 또한 정해진 수순이고. 여하튼 빌리는 한심하다고 느꼈던 동료보다 훨씬 더 한심한 놈이 되어버렸다.
외삼촌에게 빠꾸먹고 찾아간 외숙모 앞에서 온갖 동정과 연민 작전을 펼치는 주인공. 폼생폼사를 외치던 쿨가이는 어디 가고 이렇게 비굴한 인간으로 전락했을까나. 외숙모는 그를 돌려보낸 뒤, 빌리의 생활관을 직접 행차한다. 돈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고 긴 시간을 노닥거리는데, 괜히 말 꺼냈다가 미움 살까 봐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주인공. 이 장면에서 천당과 지옥을 수십 차례 오가는 빌리의 원맨쇼가 참 볼만하다. 그렇게 있다가 겨우 쌈짓돈 쥐여주고 떠나버리는 외숙모에게 뒤늦은 분노를 표하는 빌리. 그것은 지난날 외숙모와의 원나잇 후에 보여준 자신의 행동이었으니. 크게 한 방 먹은 빌리는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나타난 외삼촌의 양손에는 외숙모가 건네준 돈다발이 들려있었다.
단순한 플롯 가운데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가 대단한 작가였다. 슈니츨러 역시 도박으로 탕진하여 뼈저린 후회를 했었다고 하는데, 그런 값진 경험 치고는 좀 가벼운 작품이었달까. 의사로서도 성공했고 늦깎이 작가가 되어서도 성공했으니 아주 그냥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테지. 부와 명예를 다 이룬 연예인들이 끝내 마약에 손을 대듯이, 연속된 성공에 길들여진 슈니츨러도 자연스럽게 노름판으로 고개가 돌아갔을 것이다. 프로이트와 가깝게 지낸 것치곤 매우 실망스러운 꼴이지만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치는 게 맞다고 본다. 작중에서 빌리는 빚쟁이가 된 자신을 가리켜 억울한 희생양이라고 말한다. 냉정함을 잃어버린 그는 자기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발 벗고 나섰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이 같은 빌리의 심리상태가 오늘날 현대인들의 질병이 아닐까 싶다. 원인을 꼭 엉뚱한 데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 스스로를 괴롭힌 것도 모르면서 늘 자기는 피해자라고만 생각들 하지. 안타깝게도 세상은 원래 불공정한 법이라네, 젊은 그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