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6
알베르 카뮈 지음,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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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기분이 안 좋았다. 몇 날 며칠을 치통에 시달렸고, 빌린 책들은 연속으로 꽝이었으며, 새 직장을 들어가서 계속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무기력하던 여름에도 독서를 놓지 않았거늘, 정작 독서의 계절이 되고 나니 잘 간직했던 여유가 흩어져 버렸다. 인생의 3라운드를 맞이한 요즘, 늘 그랬듯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지만 어떻게든 통제하는 중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좀 더 단순하고 현실적이게 살자는 것인데, 이 새로운 마음가짐을 위해서 지긋지긋한 이방인의 자아를 떼어낼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이참에 고이 모셔두었던 카뮈의 <이방인>을 경건히 읽음으로써 평생의 애물단지와 그만 헤어지기를 다짐했다. 과연?


이 오래된 작품을 문학동네에서만 <이인>으로 출간했는데, 읽어보니까 ‘이방인‘보다는 확실히 ‘이인‘이란 표현이 더 와닿는다. <노인과 바다>만큼이나 단순 건조한 이야기. 주인공 뫼르소가 모친의 장례를 치른 뒤,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내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러 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전 과정에서 주인공의 태도가 심드렁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런 친구들의 영혼 없는 리액션은 꼭 오해를 낳고 소문을 키우곤 한다. 사실 이들이 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거늘 대중들은 그 언행에 타당한 이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조차도 설명을 못하니 그저 나사 빠진 사회 부적응자 정도로 치부할 따름. 최근 들어서 이런 사람들이 뉴스에 자주 나오는데, 그걸 다 정신질환으로 퉁쳐버리면 끝날 일일까. 뫼르소를 보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모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그렸던 게 아니었나 하는. 삶이 부질없다고 느낀 뫼르소는, 자신이 생각하는 해방과 새 출발을 모친의 죽음에서 발견했다. 하여 자신 또한 그렇게 되고 싶어서 더 이상 사회적 가면을 써야 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게 아닐까. 작중에서는 뫼르소의 성격이 원래부터 그런 것처럼 나오지만, 직장도 다녔고 모친도 부양했던 걸로 보아 모태쿨병은 아니다. 그저 은연중에 어떻게 살든(혹은 죽더라도) 무방하다고 판단했지 싶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뫼르소한테는 이성과 논리가 먹히지 않는다. 게다가 종교와 신까지 거부하여 영적으로도 접근이 불가했다. 그런즉 뫼르소는 스스로가 유일신이며 절대자가 되었다고들 해석한다. 그러한 관점으로 말하자면 모친의 죽음도, 자신의 살인도, 심문과 재판들도 전부 의미를 잃어버린다. 마치 머리 위를 알짱거리는 저 날벌레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죽으면 되지 않느냐는 뫼르소의 발언은, 아무리 나를 설명해 봤자 이해도 납득도 하지 못할 테니 죽고 난 뒤에 알아서들 지지고 볶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글쎄, 장례식에서의 태도야 그렇다 쳐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범죄는 그리 쿨하게 넘어갈 일은 아닐 터. 정녕 카뮈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정의하는 이방인은, 울타리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겉도는 사람이다. 애매한 공감대로 형성된 소속에서 잘해보겠다며 장단도 맞춰보지만, 그럴수록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의 관계라는 사실만 분명해진다. 끝내 자발적 아싸를 선택한 이들은 그 순간부터 타인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해버린다. 어차피 나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서로 취향 존중해 주자는 것이 오늘날의 암묵적인 룰이다. 그 정도로 차고 넘치는 이방인들의 사회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와 뫼르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법정에 선 친구들은 패륜아에다 살인자가 된 뫼르소를 가리켜 의리와 사랑이 충만한 진짜 사나이라 증언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었다. 선악이 공존하는 인간에게서 한쪽만을 택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못하는 뫼르소의 입바른 소리가 정직해서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한 의도라도 누군가에겐 악이자 불편한 진실이 되고 만다. 그러니 이해하지도 않을거면서 취향을 존중하겠다는 건 모순된 말이다.


그 밖에도 생각할 문제가 많은 작품이다. 확실히 카뮈 작품의 매력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데에 있다. 시간이 된다면 더 많은 내용들을 다뤄보고 싶다. <이인>에서 느낀 점은 한 가지다. ‘정의‘와 ‘부정‘은 같은 의미라는 것. 누군가를 정의하는 즉시 그 사람의 일부는 부정당한다는 말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모두가 ‘이인‘인데, 우리는 꼭 누군가를 지목하여 요주인물을 만들고 싶어 한다. 타인한테 관심 없다는 사람들도 이 부조리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어쩐지 카뮈가 콧대 높은 인간들의 저격수처럼 느껴지는데, 이 또한 함부로 정의해서는 안 될 일이지. 아무튼 나는 이번 독서로 이방인의 자아를 확 잘라내고 싶었다. 근데 반대로 우리 모두 이인이니까 그렇게 알라는 듯한 분위기여서 되게 민망하다. 아직은 때가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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