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블루 컬렉션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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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몇 달간 바쁘고 피곤해서 읽는 속도가 구매 속도를 한참 못 따라가고 있다. 안 그래도 느린 독서가 더 느려지면서 쌓여만 가는 책들을 보고 있자니 없던 강박증도 생길 지경이다. 그만 사고 싶어도 어디서 돈이 자꾸 생겨 안 살 수도 없는 복에 겨운 웃픈 상황이고. 이렇게 책이 안 잡힐 때는 가벼운 책이라도 읽어줘야 하는데 나님에겐 그런 책이 별로 없다. 그나마 있는 책 중에서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시>를 골랐는데, 반나절이면 다 읽을 분량을 일주일에 걸쳐서 읽어주었다. 아아,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퇴직 후 도시를 떠나 시골집을 구한 노부부. 실컷 꽁냥거릴 생각에 들떠있는 이들에게 이웃 노인이 찾아온다. 날마다 오후 네시가 되면 집을 방문하는 이 노인은 똥 씹은 얼굴로 말도 없이 앉아있다 여섯 시에 돌아갔다. 남의 집을 제멋대로 왔다 가버리는 이 불청객 때문에 대략 난감한 노부부는 예의 차리다 타이밍을 놓쳐 그만 오라고도 말 못하고 매일 네시만 되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다. 마음을 바꿔 이웃 부부를 식사에 초대한 이들은 거대한 실루엣의 등장으로 할 말을 잃는다. 


프랑스라면 몰라도 한국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작품에 푹 빠지긴 어려웠다. 초대한 적도 없는, 아직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이웃을 집안으로 들여보내는 것도 납득이 안되지만, 재수 없기만 한 노인한테 뭘 그리 쫄아서 비위를 맞춰주는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나름 이웃이니까 친해져보겠다고 질문들을 던져봤지만 대답은 예/아니오뿐이고, 왜 자꾸 귀찮게 구느냐는 얼굴로 오히려 부부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금껏 구경 못했던 요상한 캐릭터였다. 대체 어느 쪽이 집주인이고 방문객인지 모르겠더만요. 아무튼 넉살 좋고 사람 좋은 부부는 이 불청객을 어떻게든 좋게 해석하고 받아주다 지쳐서 확 손절하기로 맘먹는다. 그래 진작에 그랬어야지, 문화권을 떠나서 이건 좀 아니라니깐.


그러나 평생을 선하게 살아온 부부에게 손절이란, 돼지를 도축하는 일만큼이나 두렵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어영부영하다 손절의 기회를 계속 놓쳐서 참 멀고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부부의 우유부단+결정 장애+팔랑귀+억지 긍정+스마일 가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독자를 골려주고 싶은 작가의 장난기가 다분하던데 그렇다면 나님이 순순히 당해줄 것 같으냐. 적당한 관대함과 쿨함을 장착하고 읽었더니 장면 장면마다 심어둔 작가의 블랙 유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품을 즐기시려면 작가의 스타일부터 빨리 파악들 하시길.


노인의 아내 또한 미스터리였다. 초고도비만의 실루엣도 그렇지만 소리 지르고 땡깡 부리는 세네살 아동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제서야 차가운 말투와 똥 씹은 표정을 했던 노인을 납득하게 된다. 이런 촌구석에서 아픈 아내를 홀로 돌보며 살아온 남편의 운명과 심정을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도대체가 말야, 남의 집 왔으면 뭔 푸념이라도 늘어놓던가, 어떤 도움을 요청하던가 해야 될 거 아냐. 부부도 독자도 방황하려 할 즈음에 구세주 같은 주인공의 애제자가 집을 방문해온다. 그리고 어김없이 네시에 들이닥친 노인과, 그에게 쩔쩔매는 부부를 보며 이상함을 느낀 제자는 서둘러 자리를 떠버린다. 제자의 실망한 얼굴이 세상 충격이었는지라 마침내 폭발해버린 주인공은 노인을 거칠게 대하며 쫓아내버린다. 그렇게 기다렸던 사이다 장면인데 제로 사이다처럼 뭔가 밍밍한 맛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냐며 독자에게 죄책감을 전가하는 참 얄미운 작가의 미워할 수 없는 밀당 이야기되시겠다.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불청객이 수상해 집을 찾아간 주인공은 차 안에서 자살 중인 노인을 구해낸다. 왜 자길 방해하느냐며 똥방귀 뀌는 이 노인을 당장 솥단지에 찜쪄먹어도 부족하지만, 방안에 갇혀 살아가는 그의 아내를 집 밖에 꺼내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택한다. 노인은 자신이 케어하던 방식과 딴판인 부부에게 승질 부리다 아내가 기뻐하니 마지못해져주는 척을 한다. 자, 그러니까 지겹게도 반복되오던 밀당이 결국 두 사람을 구원한다는 결론이다. 멋대로 찾아와 평온함을 깨뜨린 노인이 싫다면서도 그와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된 주인공.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이 경우 없는 방식으로 두 사람은 그렇게 지난날의 사슬에서 풀려난다. 노인은 주인공의 스마일 가면을 벗겨주었고, 주인공은 노인을 기나긴 터널에서 꺼내주었다. 그래 뭐, 나쁘진 않은데 이걸 개연성 있다고 봐야 할지는 잘... 이래서 세상은 요지경이라 하나 봅니다. 아무튼 단순한 내용이지만 가볍게 넘길 순 없는 낫 배드한 작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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