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모 연예인이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뉴스 기사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어떤 피해자들은 이제라도 진심 어린 사과를 받으면 가해자를 용서해줄 모양이던데, 나는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트라우마가 피해자의 인생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가해자들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트라우마 극복을 하기 위해 가해자를 용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근데 사실 학교폭력보다 심각한 것이 가정폭력이다. 학대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은 단지 보호자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충성해야만 한다. 그 아이들은 훗날 성인이 되고도 공포에 발목 잡혀서 평생을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런 어른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똥꼬발랄한 겉표지에 속지들 마시라. 단맛 1%와 쓴맛 99%의 카카오 초콜릿 같은 작품이시다.
멀쩡한 집 놔두고 자동차 트렁크에서 주무시는 인간들을 트렁커라고 부른다. 낮에는 멀쩡하게 있다가 잘 때만 트렁크에 들어간다. 트렁커가 된 배경과 사연들은 다 고만고만하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두려움에서 도망치다 찾아낸 장소가 트렁크였던 것이다. 그 공간은 피난처이자 안식처였고, 세상과 단절되어 철저히 혼자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세상에 상처 입은 트렁커 두 남녀가 만났다. 둘은 보드게임을 하며 친해지고, 벌칙으로 과거를 얘기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담담히 고백하는 남자와 달리 솔직하지 못했던 여자는 제 과거를 지어내거나 바꿔서 말해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자의 기억들은 흩어지고 자아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보드게임을 통해서 현재와 과거의 시점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나 공백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눈은 과거를 보고 있어도 머리는 지금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사연들이 두 사람을 트렁커로 만들었겠구나 하는 짐작과 동시에 트라우마에서 해방되는 힌트가 과거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준다. 과거 시점으로 점프하는 플롯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이 작품은 끊김 없이 푹 빠져서 읽었다. 이 작가님도 내 스타일이심.
남자답지 못하단 이유로 부친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온 남자는, 자신이 겪었던 그대로 부친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줄 계획이다. 반면 그의 옛이야기를 듣던 여자는 뒤죽박죽된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한 노파에게 길리운 고아들 중 하나였던 여자는 그 사육장에서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보고 겪으며 살았다. 이 과정에서 자아가 분열되었고 그래서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온통 나쁜 기억들 뿐이니 이대로 다 잊고 살면 좋으련만,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이 속을 뒤집어대니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고, 그들만의 안식처도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남자는 기울어진 건물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하고, 여자는 유모차를 판매하는 베테랑 직원이다. 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볼 때 상당히 아이러니한 그림이다. 남자의 가족들은 부친의 폭력을 보고도 모른척했다. 그야말로 균형이 깨진 집안에서 자란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균형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자 또한 부모에게 버림받고 동네 똥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얼마든지 삐뚤어질만한 삶을 걸어왔지만 이들은 타인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업을 삼았다. 어쩌다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설명이 없었지만, 내 눈엔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트라우마에 대항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트렁크는 여전히 그들의 성소였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세상과 소통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두 사람 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폭력은 욕하고 때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아픈 기억을 들춰내는 것 또한 폭력이다. 그렇기에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를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는 건 평생을 폭력에 시달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트렁커들끼리도 마냥 솔직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보는 내내 가슴 아프게 했다. 그래도 자신을 알아주는 누군가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씩이나마 통제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피해자들이 언제까지고 그런 아픔 속에 지내서는 아니 될 일이다. 다들 좋은 사람 만나 아픔에서 해방되어 건강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