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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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는 남녀 연애 심리를 전문으로 다루는 채널이 되게 많다. 온갖 경험으로 무장된 그들의 막힘없는 멘트는 죄다 맞는 말 같고, 그들의 코칭대로만 하면 얼마든지 이성을 공략할 수 있을 것처럼 들린다. 근데 또 길거리 인터뷰를 하는 연애 채널을 보면 생각이 바뀐다. 인터뷰를 보면 자신의 이성 타입이나 연애관이 정말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튜버들의 말을 맹신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씀.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 좋은 이성의 조건은 내게 꽂히는 포인트를 가진 것이다. 그 포인트는 생선 뼈를 기막히게 발라내는 젓가락질이 될 수도 있고, 휴먼굴림체를 똑같이 따라 쓰는 손글씨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유독 중요시하는 것을 갖춘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호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위의 조건은 소설을 읽을 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유부단한 인물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고, 답답한 고구마 전개를 좋아하는 독자도 있고, 음울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도 있다. 뭐가 됐든 본인 취향에 맞으면 좋은 작품인데, 나는 인물이 적고 무대가 좁은 작품이 취향이다. 그 한정된 설정 속에서 쭉쭉 뽑아내는 재미와, 그걸 해내는 저자의 감각을 미친 듯이 좋아한다. 아 그냥 심플한 게 최고입니다요. 이번에 읽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내가 좋아하는 조건을 골고루 갖춘 나이스 한 작품이다. 수상 타이틀에 납득이 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겄네. 취얼쓰!


삼 년째 레트리버와 둘이서 전국여행 중인 한 남자. 그가 하는 일은 여행하며 만난 이의 집 주소로 손편지를 써보내는 것이다. 아무한테나 답장이 오는 대로 여행을 끝낼 참인데 아무도 그에게 편지하질 않아 오늘도 방랑하고 있다. 마치 답장을 받고 싶어서 편지를 쓰는 것만 같은 이 남자. 어쩌다 그는 편지에 집착하게 된 걸까. 멀쩡한 집을 놔두고 사서 고생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도 여행이라 볼 수 있나? 아무튼 여행이란 보통 뭔가를 얻기 위해 가는 건데 이 남자는 현실을 도피하려 집을 나섰다. 그가 가족들에게 쓰는 편지 내용으로 가족관계와 자신의 과거를 소개하고 있다. 유능한 형제들 사이에서 미운 오리 새끼였던 주인공은 집을 나오자 발작 증세가 멈췄고, 달고 살았던 말더듬도 점차 고쳐지게 되었다. 그래서 조부가 키우던 개를 데리고 세상으로 도피했다. 집 밖이 집안보다 편하다는 이유로 삼 년간 떠돌았다는 게 좀 무리수 같지만 그냥 넘겼었는데 여기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었다. 종이 편지만 쓰는 그의 아날로그 방식도 그저 개인 취향일 뿐이라고 생각했거늘 이런 훼이크를 쓸 줄이야. 이 정도 내공이면 장르소설을 쓰셔도 되겄다. 


남자를 따라다니는 여작가의 설정도 볼만하다. 자신이 쓴 소설을 직접 팔고 다니는 황당한 그녀. 그러나 마케팅에는 조금도 재능이 없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말더듬이 주인공이 유창하게 책을 낭독하여 손님을 끌어모은다. 늘 혼자가 편했던 그녀는 누군가와 같이 뭔가를 한다는 것을 못 견뎌했는데, 주인공을 만나면서 그 철벽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매일 밤 호텔방에서 소설을 쓰는 그녀와 손편지를 쓰는 남자. 성향이 달라도 입장은 비슷했던 이 둘은 각자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해 갇혀있던 생각과 고정관념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된다. 


전개 방식과 연출도 훌륭하지만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가장 흥미롭다. 책을 읽게 하려면 궁금해야 한다는 작중 내용이 있는데, 그 말대로 작가는 계속해서 주인공을 궁금하게끔 만든다. 대인기피증 때문에 앞가림 못하던 그가 알고 보니 멀쩡하게 사회생활하던 때가 있었고, 심지어는 누군가와 연애하던 시절도 있었다. 또한 자신의 유일한 장점인 기억력을 활용해서 남들에게 인정받기까지 했었다. 작가는 이렇게 반전 매력을 살살살 흘려가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주인공의 의외성이 독자들을 야금야금 따라오게 만들고, 개와 여자의 양념으로 밋밋할 수 있는 상황을 맛깔나게 살려냈다. 독자를 홀리는 작가의 피리 연주 실력이 정말 대단하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일로 여행을 중단하고 그만 헤어진다. 삼 년 전과 하나도 바뀌지 않은 이 남자. 정녕 그간의 여행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일까. 


남들에게 귀가하면 주로 뭐 하냐는 질문을 자주 한다. 여기서 가장 먼저 나오는 대답이 곧 상대방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가장 마음 가는 그것이 그 사람을 숨 쉬게 해주고 있을 테니까. 이런 탈출구가 사람마다 다른데 그것이 이 책의 주인공에게는 편지였던 것이다. 말더듬이가 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손편지였다. 그는 자신의 방식과 신념대로 세상과 소통하며 스스로를 구원했다. 아 진짜 취향 제대로 저격당했다. 이런 사람 냄새가 나는 이야기들이 꽉 막힌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켜준다고 생각한다. 간만에 아날로그 감성이 솟아나는 기분 좋은 독서였다. 다시 한 번 취얼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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