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지켜보고 있어 스토리콜렉터 65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저는 좀 그래요.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은 연속으로 볼 수 있어도 시리즈 소설은 연속으로 읽는 게 힘들더라고요.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도 그건 잘 안되더군요. 저는 치느님을 사랑하지만 치킨만 먹고살지는 않습니다. 백숙도 먹고 오븐 닭도 먹고 찜닭도 먹고 닭갈비도 먹고 닭볶음탕도 먹고 닭강정도 먹죠. 음식 얘기하니까 급 배고파지네요. 여튼 맛있는 음식이라도 자주 먹으면 질립니다. 간만에 잡숴줘야 더 맛있거든요. 소설도 비슷합니다. 이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읽은 게 재작년인데, 그땐 늘 비슷한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도약이 필요해 보였어요. 근데 어이없게도 오랜만에 읽으니까 여전한 패턴에도 볼 만은 합니다. 그럼 됐죠 뭐. 저는 독서 슬럼프에 걸릴 때마다 로보텀 작품을 찾는데요, 이번에는 반대로 슬럼프에 걸릴뻔했습니다. 이유는 뒤에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마이클 로보텀은 이제 국내에서 꽤 알려진 하드보일드 소설가죠. 이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쓴 하드보일드 소설은 잘 써봐야 중박이라고요. 김장도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만든 게 더 맛있거든요. 사실 하드보일드 기법은 호불호도 심하고 잘 쓰기도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범죄소설을 쓴다고 굳이 하드보일드를 따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런 작품의 주인공들이 워낙 멋있다 보니 다들 그런 스타일을 추구하는 거겠죠. 근데 이 호주 작가의 하드보일드는 좀 각별합니다. 범죄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심리학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인데요. 수사권이 없는 직업이라 그 자체만으로 핸디캡입니다. 그런데 로보텀은 이 단점을 장점으로 역이용합니다. 일단 심리학자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니까 뻔한 전개가 될 수 없습니다. 고로 타 작품들과 플롯이 겹치는 걸 막을 수가 있죠. 주인공의 상냥한 성격도 폭력적인 범죄소설에서는 단점이 됩니다. 점잖은 심리학자에게서 액션을 기대할 수가 없으니 결국 사건은 경찰들이 해결해주죠. 하지만 로보텀은 심리를 기반하여 기존의 하드보일드를 새로운 장르로 재창조해냅니다. 상황 설명 보다 인물의 독백을 더 많이 넣어서 부드럽고 유연한 분위기를 연출하거든요. 액션이 없는 하드보일드 작품의 허전함을 다른 방면으로 커버하는 것이죠. 말랑말랑한 하드보일드라니 뭔가 말이 안 맞네요. 여튼 오리지널을 넘지 않고 스스로 오리지널이 돼버린 특이 케이스입니다. 이런 게 바로 패왕색 패기 아니겠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정유정 작가를 예로 들어보죠. 정유정 작가도 초기에는 지금 같은 독기가 없었어요. 그러나 작품을 위해 피나는 취재와 연구로 대작들을 뽑아냈습니다. 이렇듯 작가는 감각도 중요하지만 자질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발로 뛰는 작가들은 그만한 보상을 받더라고요. 로보텀도 그렇습니다. 기자로 활동하며 축적해둔 데이터와 실제 범죄심리학자와의 인터뷰를 결합하여 지금의 고퀄리티 작품들이 탄생했죠. 이렇게 공들인 작품들은 대개 기본 이상은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작가들이 훗날 거장이 되고요. 여러 번 말한 거지만 소설가는 필력보다 스토리텔링이 우선입니다. 글만 잘 쓰는 작가와 글도 잘 쓰는 작가는 다르거든요. 로보텀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심리 스릴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딱딱하게만 쓰는 건 무리일 겁니다. 간결하게만 써도 좋게 봐주는 장르문학에 인간미 있는 문체를 사용한 케이스가 몇이나 될까요. 로보텀이 독보적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작품 이야기를 해볼까요. <조 올로클린 시리즈>는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처럼 악역 또는 피해자 시점의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 주인공이 액션을 보여주질 못하니까요. 근데 그거대로 가지는 매력이 있죠. 악역이나 피해자의 분량이 많을수록 스토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작품은 활력이 붙습니다. 간혹 악의 입장을 잘 다루지 않는, 그니까 악역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작품들이 있어요. 추리소설이라면 괜찮지만 일반 범죄소설에서는 마이너스입니다. 악당과 싸워 이기는 게 전부인 후레쉬맨 스토리랑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후레쉬맨이 더 재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한 여자를 염탐하고 관찰하는 X맨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런 관찰자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을 싫어해요. 대부분 동기도 약하고 찌질하거든요. 이런 설정에서 벗어나는 게 어려운가 봅니다. 암튼 시작부터 김빠졌지만 X맨이 지켜보는 여자의 처절한 인생살이가 가히 인간극장 수준이라 몰입이 잘 되더군요. 여자는 주인공의 심리상담 환자입니다. 매 편마다 주인공이 여자와 엮이는 게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하고 똑같죠. 알아서 여자가 꼬이고 썸꽃이 피어납니다. 사실 없어도 그만인 내용인데 분량 채우려고 그러는 거겠죠.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남편이 잔뜩 도박빚을 지고 장기간 실종 상태가 됩니다. 진짜 실종인 건지 잠수탄 건지는 몰라도 양쪽 다 좋은 게 아니죠. 그녀는 혼자 두 자녀를 돌보고 살림하느라 죽어납니다. 채권자의 협박으로 더러운 일까지 하게 되고요. 그런데 그녀를 괴롭힌 자들이 차례대로 죽습니다. 딱 봐도 X맨의 짓이지만 그녀는 모르는 일이고 억울하게 용의자가 됩니다. 흔한 설정에다 전개마저 뻔하다니 좀 너무하더군요. 처음 읽는데도 봤던 내용 같으니까요.


그런데 실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여자가 해리성 장애, 즉 다중인격이에요. 하아. 길 좀 막혔다고 이런 걸 히든카드로 쓰다니 참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굴러다니는 이야기들을 모아다 그럴싸하게 묶어놓았을 뿐, 참신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나마 작품을 지탱해주던 여자의 인간극장도 끝났습니다. 역시나 X맨도 별게 없어요. 여자와 아이들을 납치해가 잘 지내보자고 합니다. 그럼 이지경이 될 동안 조는 뭘 했느냐? 그녀의 다중인격과 X맨이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요, 이게 다예요. 주인공이 뭘 하는게 없어서 내가 다 민망하네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뒷짐지고 불구경하는 수준입니다. 앞서 얘기한 단점을 장점으로 뒤집는 장면이 단 하나도 안 나와요. 대박 친 시리즈 소설들은 중간에 쪽박 작품이 꼭 있는데, 올로클린 시리즈는 이 작품이 쪽박이었습니다. 거장도 사람인데 슬럼프가 올 수도 있겠죠 뭐. 그래도 못하다가 한번 잘하는 것보다야 잘 하다 한번 못하는 게 더 낫습니다. 나름 인간미도 있고요. 근데 책값은 아깝습니다. 이만 로보텀 행님과 저의 슬럼프 극복을 응원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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