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인정하긴 싫지만 나에게도 오래된 강박증이 있다. 알림 표시를 보면 절대 가만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메일이 오면 일일이 확인해서 삭제하고, 문자나 메신저가 오면 꼭 읽음으로 상태를 바꾸고, 각종 어플의 푸시알림들도 받자마자 지워버려야 마음이 놓인다. 나름 털털하고 프리하게 사는데 왜 유독 알림 표시는 못 참는지 모르겠다. 이 같은 강박증이 누구나가 한두 개쯤 있을 텐데, 정유정 작가는 글에서 그런 강박증이 느껴진다. 이 책을 포함한 그동안의 작품으로 받은 정유정의 느낌은 ‘프로페셔널‘이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해야 하고, 폭발 속에 절제도 있어야 하며, 동시에 글맛과 흡인력도 갖춰야만 하는, 쉽게 말해 완벽주의자 성향이랄까. 근데 전부 다 소화해는 걸 보면 강박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듯하다. 정유정 작가는 이 책으로 문학상을 타고서 명성을 얻었는데, 스릴러의 여제가 이런 뽀송뽀송한 글도 썼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정신병원 탈출을 반복하는 희대의 빌런인 승민과 엮여 관심사병이 된 수명. 그는 자유를 갈망하는 승민을 보며 도망쳤던 세상에 다시 발을 내디디려 한다. 마침내 자신의 진짜 적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이들은 세상에 외친다. 나를 막으려거든 내 심장을 쏘라고. 


우울하고 낙담 가득한 상황에 비해 분위기는 내내 밝기만 하다. 두 남자의 쇼맨십이 절망 속에서도 명랑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일단 배경이 배경인지라 별별 캐릭터가 다 나온다. 그 덕분에 자잘한 에피소드도 나오지만 작품을 이끌어가는 승민의 분량이 가장 많다. 그만큼 비중 높은 인물인데 그의 말을 빌리면, 정신병원에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친 자가 있다. 승민은 전자이고 수명은 후자이다. 병원에서 점점 미쳐가는 승민은 수명이 도망쳐온 세상을 향해 팔을 뻗는다. 그는 탈출할 생각도 없으면서 자신을 돕는 수명에게 넌 무엇과 싸우고 있냐고 묻는다. 이 무슨 소년만화에 나올법한 대사입니까. 근데 오글거림은 1도 없는 이야기니까 안심하시길.


사건보다는 인물 위주의 내용이므로 캐릭터 얘기나 많이 하자. 뚜렷한 목표를 가진 타 주인공들에 비해 수명은 그런 게 없다. 그런 이유로 기를 쓰고 탈출하려는 승민이가 더 주인공 같다. 보통은 주인공이 주변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이 책은 그 반대이다. 주인공이 남들에게 영향을 받고 성장하는 방식이다. 이같은 설정은 드라마틱한 전개엔 효과적이나 수동적인 자세 탓에 인물의 매력이 반감된다. 예를 들면, 수명은 점박이의 괴롭힘과 숨 막히는 병동 규칙 속에서도 승민처럼 탈출하려는 마음이 없다. 그의 겁 많고 찌질한 모습은 독자에게 이쁨은커녕 동정받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수명의 생각과 행동들이 거슬리지 않는 것은 정신병 환자라는 설정 덕분이다. 그래서 수명에게는 목표의 부재와 수동적인 태도와 부족한 개성이 문제 될 게 전혀 없다. 그랬던 친구가 각성하더니 목표도 생기고 능동적으로 변하는 등 주인공의 조건을 하나하나 충족해나간다. 많은 작가들이 장점을 더 살리는 쪽을 택하지만 정유정은 단점을 매력으로 승화하는 쪽을 택했다. 정말 멋지심다. 이제껏 타고난 흑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나름 백마법사였네. 근데 간간이 등장하는 블랙 유머와 시리어스한 연출에서 흑화의 낌새가 보인다. 이후에 쓰신 다크한 작품들을 보면 정유정은 흑화당 출신이 확실...


다른 리뷰에도 썼던 말인데, 정유정은 글 잘 쓰는 작가는 아니다. 그리고 작가로써 재능이 타고난 쪽도 아니다. 오로지 철저한 노력으로 정면돌파하는 케이스이다. 이런 유형의 작가들은 아무래도 감성적인 맛이 약해서 호불호가 갈리기 쉽다. 실제로 정유정의 소설은 읽기 어렵다는 분들이 많은데 반대로 나는 이런 노력파의 글을 더 좋아한다. 소설은 무조건 스토리가 먼저다. 그게 안되니까 필력으로 승부차기하는 작가를 많이 봤는데, 나는 그런 걸 싫어한다. 비록 계산적이고 감성이 좀 약해도 정유정 같은 이야기꾼이 더 좋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뒤 내용이 궁금하지가 않다는 것. 주로 스트레이트한 글을 써서 속도감 있고 몰입도 잘 되는 편이지만, 곡선이 없다 보니 독자의 생각이 개입할 틈이 없다. 그녀의 작품에는 푹 빠져서 정신없이 읽었다는 평이 꼭 있는데, 이건 독자와의 소통이 결여돼있다는 말도 된다. 다른 작품들도 그랬지만 휴머니즘을 다루는 이 책은 그래선 안됐었다. 감정이입이 반 토막 나거덩. 여튼 그런 거 다 감안하고도 훌륭한 작품입니다만 아무리 봐도 정유정은 흑마법사일 때가 더 므찌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