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이 없다
조영주 지음 / 연담L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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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서 책을 집어 든 건 진짜 오랜만인데? 나 같은 독자도 있으니까 작가분들은 제목 좀 신경 써주시길. 알다시피 반전이란 게 장르문학에서는 필수라서 그 한 방에 목말라있는 독자를 위해 작가들은 머리를 쥐어짜내지. 그러다 보니 반전이 없거나 약한 작품은 상대적으로 밋밋해 보이고, 저자만의 감성은 홀대받는 듯해. 근데 나는 언제부턴가 유독 반전으로 유명한 작가들이 싫어지게 됐어. 반전에 강박관념이 있는 건지 연속으로 빵빵 터뜨려대는 플롯에 질렸거든. 그런 작가들은 강약 조절도 잘 못한다? 강속구만 던지면 그저 멋있다고 생각하나 봐. 또 반전에만 몰빵해서 만든 작품들은 개연성도 엉망이고 완성도는 뭐 말도 못해. 그런데도 과대광고하는 출판사들이 너무 많아. 꼴 보기 싫어 아주. 안타깝지만 이 책에도 과대광고가 좀 있었는데 그 부분은 뒤에서 설명할게. 그럼 스탓뜨.


책 뭉치로 얼굴을 두들겨 맞아 죽은 살인 사건이 생겼어. 피해자는 집안에서 우비를 입은 채였고, 주변에는 반전 페이지가 뜯겨진 추리소설들이 굴러다녀. 이 같은 사건이 계속 발생했고 피해자들은 모 출판사의 관계자들이란 걸 알아냈지. 뭔가 싶어 조사해보니 20년 전 누군가가 거액의 돈을 들고 날랐다는 거야. 아무래도 범인은 그 사건에 엮인 누군가가 아닐까? 안되겠는지 경찰은 휴직 중인 노장 형사를 찾아가서 사건을 맡아달라고 해. 근데 이 형사는 말년에 안면인식장애가 생겨버렸어. 가족 얼굴도 못 알아보는 그가 수사에 뛰어든 건 자신이 좋아하는 추리소설이 살인무기인데다 찢겨진 반전 페이지들 때문이었지. 그런 이유로 노장의 위태로운 쇼 타임이 시작된다는 얘기.


이렇게 나이 든 사람이 주인공을 맡아도 나쁘지 않은듯해. 솔직히 요즘의 젊은 형사들은 너무 완벽해서 현실감이 없어. 그래서 작가들이 꼭 핸디캡 한두 개씩은 부여하는데,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주인공이 골골대는 게 너무 싫어. 딱딱한 형사들의 인간미를 꼭 질병이나 트라우마를 통해서만 끌어내는 방식도 이젠 좀 식상하지. 그렇지만 이 책도 클리셰 가득한 구식을 따라 했어. 안면인식장애를 가진 형사라. 치매 걸린 형사의 뉴 버전이라 해도 되겠네. 휴직임에도 후배들이 찾아오는 걸 보면 왕년에 좀 날리셨는가 봐. 매번 부탁에 못 이기는척하는 모습이 귀여우시더라고. 전형적인 형사 성격이지만, 티 나지 않게 남들을 챙기는 게 주인공의 매력이었지. 후배들을 쥐락펴락하면서도 얼굴들을 몰라 깨갱하는 이 캐릭터가 반전 그 자체였던 거야. 그런데 알고 보니 조영주 작가도 똑같은 병이 있다네? 그러니까 주인공 이꼴 작가란 말인데, 자신의 치부를 공개하면서까지 이 책을 썼다는 거잖아? 다 같이 물개 박수 쳐주자.


그럼 이제 실망한 것들을 읊어볼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사건보다 주인공이 가진 장애의 설정이 더 중요하다고 봐. 형사의 예리한 감각과 내면의 불안이 계속 부딪히는 건 좋아. 문제는 그 병이 핸디캡 역할에만 충실했을 뿐, 사건을 추리하는 매개체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는 거. 그 장애를 수사에 이용했더라면 초 특별한 히트작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기존 작들하고 또이또이야. 그리고 주인공을 졸졸 따라다니는 김나영 형사도 솔직히 설정 미스야. 오토바이를 타며 밤낮없이 출동하는 모습에 행동대장인 줄 알았는데 이렇다 할 액션이 하나도 없는 거야. 차분한 성격에 기억력도 좋아서 지략가 쪽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드만? 실적도 없는데 일찍 출세했고 빵빵한 집안을 가진 설정이 다 무슨 소용인지. 그리고 동료의 약점과 빈틈을 보완해주는 게 파트너의 역할 아닌가? 주인공 혼자 다 해 먹으라고 옆에서 추임새만 넣고 있던데 비중은 왜 그리도 많은 겨? 눈에 계속 거슬려서 혼났네.


이 책은 사건 말고도 추리소설에 대한 저자의 애정으로 가득한데, 그중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이 유독 많이 나와. 주인공을 세이초의 열혈팬으로 설정했고, 세이초의 이름을 뒤집어 ‘초이세‘라는 한국작가로 오마주 했더라고. 게다가 카메오로 등장시켜 추리작가의 시각으로 수사를 돕기까지 해. 본인이 세이초 덕후란 걸 이런 식으로 인증하다니 참신하네. 또한 무대배경과 인물들을 출판업계로 설정한 것도 좋았어.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그쪽 바닥의 고충이라던가, 책을 대하는 자세나 순수함을 조명하는 저자의 의도가 느껴졌으니까. 근데 메시지 전달에 신경 쓰느라 메인 사건은 갈수록 부실해지는 게 보였어. 일단 범인과의 심리싸움이라는 광고부터가 틀려먹었어. 등장조차 안 하는 범인과의 핑퐁을 어디에서 봐야 할까? 범인이 반전 없는 소설책을 남겨둔 건 경찰과 술래잡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어. 다음 범행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20년 전 사건의 진실을 위한 일종의 쇼였던 거지. 연속 살인 속에서도 전혀 촉박함이 느껴지지 않은 건 그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옛 사건의 관계자들을 컨트롤하지 못한 부분도 저자의 큰 실수야. 하나같이 어영부영한 태도와 어설픈 증언들로 어딘가 수상한 기색을 연출한 것 까진 괜찮았어. 근데 너무 뜸 들여가지고 밥이 그만 다 타버렸어. 독자의 흥이 가라앉은 뒤에 반전을 꺼내면 어쩌자는 걸까. 겨우 이걸 보여주려고 그렇게 질질 끌었나 싶던데. 이래서 추리소설은 타이밍도 잘 봐둬야 해. 암튼 구멍도 많고 곁가지도 많은 작품이지만 저자의 용기 있는 도전과, 반전 매력의 소유자인 주인공을 봐서라도 별 4개는 줘야겠어. 이제 그만 졸려서 자야겠다. 내일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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