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종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
빈스 플린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코로나와 더위와 습기와 스트레스 때문에 집중이 바닥나 한 달 정도 독서를 내려놨더니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는 게 정말 쉽지 않다. 그렇게나 오랜 습관을 들여왔는데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보면 인간이란 이토록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임을 실감한다. 여튼 슬럼프에 걸렸을 땐 무조건 재미있는 작품을 읽어야 한다. 이번에도 그런 책을 골랐는데 워낙 들쑥날쑥하게 읽어서 슬럼프를 탈출했는진 모르겠다. 사실 독서 자체의 문제보다는 굳어져 버린 전두엽 땜시 글이 안 써지는 문제가 더 크다. 그래도 억지로 읽고 영양가 없는 리뷰를 쓸 바엔 푹 쉬는 게 더 낫다고 조용히 합리화해본다. 내가 뭐 1년에 100권 읽기 할 것도 아니고요.


보통 스타 작가는 남녀노소에게 인기 있거나 여성들에게 인기 많은 타입으로 나뉘지만, 아주 간혹 남성들에게 사랑받는 타입도 존재한다. 빈스 플린이 그런 사람이다. 고인이 된 그는 이 책을 시작으로 CIA 미치 랩 시리즈를 탄생시켰는데 주로 정치, 군사, 첩보물을 다루고 있어 남성들은 열광하고 여성들은 시큰둥한 편이다. 책을 거의 등한시하는 대다수의 남성들 가운데서 소수에게 인기 좀 있어봤자 뭐 얼마나 대단하겠냐마는, 남성들의 팬심이란 단순한 빠돌이 수준을 넘어서 충성을 맹세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작가에게 큰 이변만 없다면 평생 꾸준한 사랑과 응원을 받게 되는 법이다. 당연한 말을 쓸데없이 길게도 쓴다고 생각한다면 순전히 기분 탓이니 그런가보다 하십쇼.


시리즈의 프리퀄 작품으로써 미치 랩이 등장하기 이전의 배경을 다루고 있다. 저자의 소개 글을 잠깐 적자면, 작가는 60곳의 출판사에서 외면받았고, 자비로 이 책을 출간하여 초대박을 치게 되었단다. 초반 몇 장만 읽어봐도 이렇게나 흥미진진한데 왜 출판사들이 거절을 했을까. 작품 보는 눈이 없었던가, 시장을 파악하는 감각이 없었던가, 아님 작가가 그냥 마음에 안 들었던가, 혹은 셋 다인 건가 싶다. 여하튼 다른 리뷰에서도 말한 바, 이 시리즈는 장르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정치 스릴러이다. 스릴러 장르에서 의학, 과학, 법정물이 상위 랭크를 차지하고 있지만 빈스 플린의 작품을 읽으면 역시 정치물이 최상위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상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보자면, 정치물은 언제나 안팎으로 적들뿐이고, 무조건 기싸움 즉 심리전이 일어난다. 여기서 판이 커지면 안보 문제도 생겨서 액션도 첨가되고, 자연스레 무대나 배경의 스케일마저 커지는데 이 모든 요소를 개연성 있게 풀어나가면서 재미까지 책임져야 하니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그 어려운 걸 해내고 시리즈까지 만들어 매번 대박 터뜨리는 빈스 플린은 솔직히 마이클 코넬리나 제프리 디버보다도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미국 대통령의 재선 준비가 한창일 때, 유명 정치인들이 하나하나씩 암살당한다. 늘어만 가는 나라의 빚과 대통령의 불필요한 예산안을 지적한 범인들은 어느새 의적이 되었고,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FBI가 수사에 나서고 국가와 기관마다 협조전을 날리지만 하나같이 커트당해 이상히 여긴다. 지금 같은 초 비상사태에 위에서는 대체 무슨 꿍꿍이들이실까.


이 책까지 총 5권을 읽었는데, 어떻게 매번 심각한 빅 스케일의 음모론을 이리도 잘 다루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두어 배경과 캐릭터를 쓰기 때문에 실제 같은 생동감과 현장감이 든다는 점이다. 이게 팩션물과는 좀 다른데, 팩션이 실존 인물이나 실제 역사와 사건을 적절히 융합하고 비트는 반면, 이 시리즈는 실존하는 기관과 조직의 체계, 다양한 직업군들의 행사와 영향력,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태와 국가 안보 위협 등을 가지고 쓰여지는 스토리이다. 마치 학자들이 설명하는 지구 종말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처럼 믿기지 않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해보면 이해될 것이다. 근데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인들은 똑같은가 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더러움을 마다하지 않는걸 보면. 그들은 전부 범죄하고 은폐하고 거짓말하고 위장한다. 그렇게 남모를 비밀을 한 가지씩 늘리다 보면 어느새 사회를 쥐락펴락하고 국가의 안보를 흔들만한 자리까지 올라가있다. 그러니 인성 밥 말아먹고 부패한 정치인일지라도 함부로 건들 수가 없다. 이 책은 그런 위치의 사람들로 일어난 사달을 다룬다. 일은 외부에서 터졌지만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그걸 눈치채면 뭐 하나. 같은 배를 탄 사람들끼리는 서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이다. 스팀 오르지만 정말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뜻.


대통령의 목숨까지도 위협해대는 암살자들의 플레이를 보면서도 대통령과 측근들은 거짓말로 상황 모면하고 국민에게 이미지메이킹 하느라 분주하다. 오만함과 멍청함과 교활함으로 중무장한 이들을 보며 정치계는 진짜 개판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FBI와 CIA의 수사를 방해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며 참 정치인답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어째서 그게 당연한 사실처럼 돼버렸을까. 여튼 수사기관들이 똥줄 타고 개고생을 하든 말든 본인들의 숟가락만 챙기기 바쁜 그들은 폭력과 살인으로 민주주의를 더럽혔다며 범인들을 욕하였다.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건 분명 잘못된 방향이다. 당연히 법과 질서가 먼저고 우선이다. 그러나 그 법이 사회적 붕괴를 막아주지 못하고 질서가 혼돈을 잡아주지 못한다면? 물리적인 힘이 오히려 꿩 먹고 알 먹는 효과라면 어떨까? 생각해보라. 6조로 늘어난 나라의 빚을 메꾸기 위해 정치인들은 세금을 더더욱 늘린다. 또한 그들은 이 국가부채의 문제를 개혁할 마음도 전혀 없다. 당신이라면 그들을 확 갈아엎고 쿠데타 일으키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상상만으로 그쳤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으니 그야말로 초 센세이션 한 작품이다. 근데 사실 지네 나라 비난하는 내용이라 당시 미국 출판사들이 떨떠름할 만도 했겠다야.


그런데 시리즈 프리퀄이라면서 왜 미치 랩은 언급조차 되어있지 않은 걸까. 이 책만 보면 CIA보다 FBI가 더 비중이 높은데 이후 작품부터는 어떻게 CIA가 주축이 되어 스토리가 진행되는지, 미치 랩이 어떻게 시리즈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한 건지 알 길이 없다. 프리퀄이면서 스핀 오프 느낌이 든달까. 미치 랩이 없어서 재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박살 내버린 대단한 작품이다. 그리고 저자가 부패한 정치와 사회에 할 말이 참 많았다는 걸 느꼈다. 사실 몇 권 읽어보면 국뽕이 대단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지만 까야 할 때는 확실히 까고 깐데 또 까는 멋진 작가다. 이런 작가들이 많으면 좋겠는데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보기가 힘들더라. 요즘 출판사에서 줄기차게 광고하는 외국의 신인 작가들에게는 거장의 그랜드 한 맛이 없다. 나는 순한 맛보다 매운맛을 더 좋아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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