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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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나 외교 쪽 못지않게 심리전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 가정이다. 그래서 가족을 소재로 한 심리소설은 첩보물만큼이나 넘쳐난다. 현실에서도 비극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독자들이 유독 심리소설에 열광하는 건 아마도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개연성 있는 막장 시나리오를 은근히 바란다는 거다. 그만큼 더 임팩트 있고 자극적인 걸 원한다는 뜻이겠다. 그런 면에서 심리 스릴러는 대중들이 원하는 조건을 모두 다 갖춘 퍼펙트 한 장르이다. 각종 비밀과 음모, 복잡한 과거, 잘못된 만남, 불편한 진실, 배신감과 수치스러움 등등 ‘막장‘하면 떠오르는 모든 게 들어있다. 그러면서 개연성도 있고 작품성도 갖췄다. 특히 작은 성냥불 하나가 점점 커져서 온 집안을 태워버리는 과정의 리얼리티가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장르는 뭐랄까,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죄책감도 든다. 불안해하는 타인의 심리 상태를 보면서 스릴을 즐기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슨 변태 사이코패스같이 느껴져서 말이지. 나 같은 기분을 느껴본 독자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만, 소설인데 재미있으면 그만 아니냐라고 생각하기엔 쪼까 거시기 혀...


남편 얼굴에 총탄을 갈긴 아내는 실어증에 걸리고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심리상담사인 주인공은 모두가 포기해버린 이 환자를 치료하기로 한다. 환자의 과거를 통해 여러 가지 불행을 알게 되었지만 살인을 저지르기엔 불충분해 보인다. 남들이 말한 대로 그녀가 했던 말들이 전부 정신 나간 헛소리에 불과한 걸까. 지금의 그녀는 맛이 간 연극을 하는 것일까. 서로가 불신한다면 어떻게 심리치료를 한단 말인가.


심리 스릴러는 일반 스릴러보다는 스릴감이 약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대신 인물 간에 밀당은 정말 잘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의 인물관계는 전부다 일방통행이다. 매번 오른쪽은 으르렁대고 왼쪽은 깨갱거려서 팽팽한 기싸움은 볼 수 없었다. 물론 주인공의 일인칭 시점으로 다룬 심리소설이 없지는 않으나, 대개 그런 경우는 복합장르를 다루어서 부족함을 채우곤 한다. 이 책도 나름 복합장르를 시도하긴 했다. 남편을 살해하고 벙어리가 된 아내는 미스터리 요소로 딱이지만 이전까지의 부부 이야기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건물 밖에서 아내를 구경하던 괴인의 등장으로 호러 분위기가 되었으나 정신병자 취급당한 그녀였기에 괴인의 존재는 먼지처럼 떠나갔다. 또한 아내의 주변 남자들과 복잡한 N각 관계까지 형성했지만 하나같이 엑스트라처럼 조용히 퇴장한다. 아 진짜 뭐 이러냐. 정말 용두사미라는 표현조차 아깝다잉.


두 번째로 아쉬운 건 주인공의 동기 부족이다. 심리상담사로써 환자의 실어증을 고쳐주고 싶은 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주인공은 투철한 사명감이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으로 치료를 자원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본인의 커리어를 위함도 아니고, 유명세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목적이 있기는 할 텐데 도무지 언급된 장면이 없다 보니 점점 그러려니 하게 된다. 두 남녀는 어릴 때 가족들에게 상처 입고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동병상련의 마음이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가는가 했는데 그것마저도 아니었다. 게다가 마리화나로 오락가락하는 주인공이었기에 어디까지가 본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뚜렷한 동기가 배제되어 있다 보니 그냥 그런갑다 하고 읽게 된다. 팥이 반만 들어있는 붕어빵을 먹는 기분이랄까.


주인공이 환자를 치료해가는 장면과, 바람난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되며 나온다. 그래서 낮에는 세상 친절한 얼굴로 병원에서 열 일하다가 밤이 되면 아내 문제로 골머리 앓는 중증 환자가 된다. 이렇게 괴로운데 매일매일 멀쩡하게 출근을 하고 환자를 상담하는지 좀 의아했는데 그게 다 독자를 속이기 위한 연출이었다.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셔도 좋겠지만, 추천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여하튼 환자의 주변인들을 조사하면서 그녀의 침묵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친구인 화랑 대표는 그녀의 미술 재능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았고, 사촌 동생은 도박으로 탕진하고서 돈을 꿔갔고, 남편의 형은 그녀를 성추행했고, 부친은 모친 대신 그녀가 죽어야 했다며 폭언을 일삼았다. 이 정도면 정신병 걸릴만하겠다 싶었지만, 어째서 그녀는 적군이 아닌 유일한 아군인 남편을 쏴 죽였나. 얼마나 큰 배신감이 들었길래 그랬는지 아무리 추측해봐도 잘 모르겠더라. 위에서 말했듯이 심리전이 전혀 없는 작품이라서 추측이 불가합니다요. 아 놔.


등장인물마다 사연을 갖게 하여 스토리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점은 칭찬한다. 그런데 그렇게 비중 있는 역할들이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어떤 매듭도 없이 사라진다. 환자의 친구는 병문안 오는 것을 굉장히 꺼려 했는데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고, 남편의 형은 그녀가 죽어가자 갑자기 나타나 울며불며 속마음을 고백하는데 완전 뜬금없었고, 수간호사와 문제적 환자의 불미스러운 거래 관계의 뒤 내용도 없었고, 무엇보다 바람난 주인공의 아내의 뒷이야기가 뚝 잘린 게 가장 당황스러웠다. 아니, 메인 요리가 중요한 건 맞는데, 그렇다고 밑반찬을 막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건 손님에 대한 성의가 없는 겁니다요. 이제 마이클리디스는 노맛집으로 등극되었습니다. 원래 맛집보다 노맛집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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