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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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길 바랬어.
온 세상이 너무나 캄캄해 매일 밤을 울던 날.
차라리 내가 사라지면 마음이 편할까.
모두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두려워…

아름답게 아름답던 그 시절을 난 아파서,
사랑받을 수 없었던 내가 너무나 싫어서,
엄마는 아빠는 다 나만 바라보는데,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자꾸만 멀어만 가… 

< 볼 빨간 사춘기 - 나의 사춘기에게 >


내가 요즘 가장 즐겨듣는 곡이다. 꼭 내 얘기 같아서 온몸의 신경이 멈추고 회로가 마비되는 기분이다. 힘든 가정집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다 보니 언제나 기가 죽어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친구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용돈과 학원과 쇼핑과 문화생활들이 내게는 엄청난 사치였다. 차비라도 아껴보려 초중고를 다 걸어 다녔고, 음식을 남긴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으며, 생일 선물 얘기는 꺼내본 적도 없었다. 불만을 가진 적도 없는 걸 보면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좋아하는 걸 얘기하면 나는 철없는 놈이 되었고, 투정이라도 부리면 세상에 둘도 없는 불효 자식이 되곤 했다. 그래서 하나둘씩 포기하며 살다 보니 커서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가장 어려워하는 건 ‘뭐 먹고 싶냐‘라는 질문이다. 선택권 없이 주는 대로만 먹어서일까, 지금도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없다. 먹는 게 남는 거라지만 나는 식비로 나가는 돈이 너무나 아깝다. 지금의 내 모습들이 아마도 어릴 때 충분한 케어를 받지 못해서가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위의 노래가 떠올랐고, 나의 소년 시절이 생각나버렸다. 아무런 꿈도 없이 저절로 성인이 되고 사회에 버려지는 게 두려웠던 과거가.


완전체 엄친딸인 언니는 화재 속에서 아기였던 유원을 구하고 명을 다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회자되었고, 사람들은 유원을 통해 죽은 언니를 생각했다. 그렇게 유원에게는 언제나 죽은 언니가 따라다녔다. 살아있는 자신은 없는 존재였고, 죽은 언니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언니 자랑만 하는 모두가 지겨워 침묵을 택한 유원. 언제쯤이면 언니를 대신하는 삶이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의 삶을 살게 될까.


언니가 아파트 창밖으로 떨어뜨려준 아기 유원을 맨몸으로 받아낸 아저씨는 사회의 영웅이 되었으나 다리 한쪽을 평생 절어야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유원이지만 이야기는 이 아저씨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매번 사람 좋은 얼굴로 집엘 찾아와 걸핏하면 신세 지고 돈을 꿔가는 아저씨. 생명의 은인이라는 고마움과, 딸 때문에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죄책감에 간이고 쓸개고 다 주려는 부모님. 그러나 유원의 눈에는 깨갱하는 부모가 답답했고, 자꾸 선을 넘는 아저씨가 불편했다. 악의가 없는 것도 알고, 그를 외면할 입장도 아니기에 참아왔지만 아저씨는 더 이상 은인이 아니라 불청객이었다. 며칠씩 집에서 머물기도 하고, 부모가 없을 때 집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모든 게 내 덕분이라는 듯한 생색을 내는 아저씨를 경멸했다. 차라리 약점을 잡아서 괴롭히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이 상황과 관계가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사실이 소녀를 절망케 했다. 딸의 불편함을 시종일관 모르는 척하는 부모님은 대체 아군일까 적군일까.


기댈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죽은 언니의 절친은 유원을 친동생처럼, 부모님을 친가족처럼 챙겨주었다. 언니 친구를 많이 의지하고 따랐지만, 그 언니마저도 유원의 얼굴에서 죽은 언니를 찾고 있었다. 언니 친구가 임신을 하자 유원은 아기가 태어나면 누구보다도 사랑해줄 것을 약속한다. 그 이유가 너무 슬펐는데, 죽은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그 아기밖에 없기 때문이라 했다. 언니라는 절대적인 존재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정말 오죽했으면 그런 생각을 다 할까. 자신의 인생은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였고, 이제는 죽은 언니의 삶을 대신해서 살아주고 있는 유원이었다. 왜 모두가 떠난 사람을 계속 붙잡아두려 하고, 산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 바라봐 주질 않을까. 제 잘못은 하나도 없었건만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변인들의 태도가 소녀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언니 친구와의 거리가 생긴 뒤로 다시 혼자가 된 유원은 수현 남매를 만나면서 좁았던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공부도 못하면서 당당했고, 하고 싶은 말은 절대 참지 않았고, 봉사활동에만 에너지를 쏟는 수현. 매사에 무표정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졌고, 연기자가 되어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는 정현. 여태 자신은 방관하기만 했는데 수현 남매는 어떻게든 나아가려고 노력 중이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자신과는 전혀 달랐던 둘을 보며 알게 모르게 자극을 받은 유원은 알지 못했다. 이 순간이 곧 송충이에서 나비로 변하는 순간이란 것을. 평생을 송충이로 살아온 소녀는 제 몸에 돋아나는 날개가 신기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복잡 미묘한 마음에 부정하고 외면했던 새 감정을 조금씩 천천히 받아들였고, 어느새 높이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집안을 쥐락펴락하는 아저씨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했고, 질긴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소녀의 첫 비행은 대성공이었다.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 성장하는지 아시는 분? 정답은 롤모델을 잘 만나야 한다.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뒤따라오는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이 생겨난다. 죽은 언니의 친구를, 수현과 정현을 통해 현실을 타개하고 세상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 유원.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뀌고 싶다면, 변화를 원한다면 움직여야 한다. 백날 시켜서 하는 행동이 아닌, 스스로 인식해서 하는 행동이 개혁을 일으킨다. 여하튼 너무 잘 읽었다. 솔직히 아몬드보다 훨씬 낫다. 지극히 청소년 문학이면서 전 연령층을 향한 이야기였다. 그 시절을 지내온 모두가 겪었던 고민과 감정들로 도배된 낡은 방속에 있다 나온 기분이다. 사랑 노래보다도 이별 노래가, 희망의 노래보다도 위로의 노래가 더 와닿듯이 주인공의 결핍과 고립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서 더 와닿고 공감이 되었다. 애잔하고 아련한 이 밤, 볼 빨간 사춘기 노래나 듣고 자야겠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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