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연휴 기간 동안 책이나 실컷 읽어야지 했던 계획과 달리 저질체력의 몸뚱이는 잉여로운 침대 생활 속에 젖어버렸다. 먹고살기 바빠서 정해진 일정대로만 살다 보니 흐르는 세월이 아까워 뭐라도 해보자며 시작한 것이 독서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제는 낭비되는 시간들이 그렇게 아깝지만도 않다. 나의 독서는 삶의 템포를 늦추고 유연한 생각을 만드는 데에 의미를 두고 있지만, 때로는 그것이 나를 옭아매는 사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정녕 나는 독서가 좋은 것인지 스스로를 의심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괜한 걱정이었다. 독서 슬럼프의 원인과 해결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방전된 배터리는 재충전을 해야 한다. 단 것도 먹어주고, 카페인도 섭취하면서 컨디션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독서가 안 내킨다면, 아직 회복이 덜 된 것이니 좀 더 주무시면 된다. 책을 의무가 아닌 취미로 읽는 사람이라면 참고해보시길. 게으른 나의 독서 생활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느라 말이 길어졌다. 오랜만에 코넬리 옹의 서브 시리즈인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를 골라봤다.


장기간의 재활원 생활을 마치고 다시 변호사로 복귀하는 미키 할러는 라이벌이던 변호사가 갑자기 살해당하면서 그의 모든 담당 사건들을 넘겨받게 된다. 의뢰인 중에는 살인범으로 찍힌 영화사의 대표가 있었고, 이 거물의 변호에 반드시 성공해서 완벽한 부활 신고식을 할 생각이다. 죽은 변호사가 숨겨둔 마법의 총알을 찾아낸 할러는 그것으로 재판을 승리로 이끌어간다. 한편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살인범의 냄새를 맡고 불안에 휩싸이는 할러. 그리고 그에게 접근하는 해리 보슈와 경찰들. 할러는 어떤 위험에 빠진 것일까.


형사물인 ‘해리보슈 시리즈‘는 사건을 파헤치고 수사하는 속도가 시원시원한 편인데, 법정물인 ‘미키 할러 시리즈‘는 액션이 필요 없는 작품이라 진행이 매우 더디다. 또한 등장인물은 많은데 이해관계는 복잡해서 정리하느라 집중력이 오래가질 못했다. 더군다나 1편인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를 읽은 지 한참 지나서 시리즈의 전후가 가물가물하다. 이래서 시리즈는 텀을 길게 두면 안 됨. 암튼 자칭 교활한 천사였던 할러는 1년의 공백 기간이 지나서 매우 유해져 버렸다. 실력이야 여전했지만 어쩐지 캐릭터를 잃어버린 느낌이다. 아무튼 이번 편부터 할러와 보슈 두 사람은 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데, 스타일이 정반대라서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으르렁 갸르릉 거리고 있다. 보슈에겐 융통성과 온유함이 필요하고, 할러에겐 윤리와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두 캐릭터를 붙여서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했다. 다 좋은데 브로맨스는 자제해줬으면.


일거리를 여러 개 받아서 좋기도 하겠지만 범인이 라이벌의 중요 자료들을 들고 날랐다는 게 문제였다. 나름대로 사건을 정리해봐도 구멍은 많았고, 사건들 간에도 연관성이 보이는데 그것마저 알 수 없으니 지금 가는 길이 막힌 길인지 뚫린 길인지 캄캄하기만 했다. 암튼 여러 사건을 맡아서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내용이 계속 교차되고, 등장인물도 여럿 쏟아져 나와 중간까지는 정신이 너무 없었다. 갈수록 판은 커지는데도 좀처럼 명확한 길이 안 나와서 너무 시간만 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 그래도 느릿느릿한 장르인데. 이번 작품의 핵심은 ‘거짓말‘이다. 법조계의 고인 물이 다 돼가는 주인공은 그간의 경험으로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믿고 있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거짓말로 남들을 이용하던 그가, 반대로 그 거짓말에 이용당하는 프로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항상 나는 놈의 입장에 있다가 뛰는 놈의 입장이 되고 보니 답답해 죽으려 한다. 늘 그렇듯이 당근 한입 주고 미친 듯이 채찍질하는 사디스트 작가 마이클 코넬리였다.


아무리 무죄를 주장한다지만 당당함이 우주를 찌르는 의뢰인의 태도는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기보다, 사회의 위치가 그런 인품을 낳은듯해 보였다. 어쨌건 이 거물의 변호를 위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건 맞지만, 할러 자신이 누군가의 표적이 되었다는 불안감과, 지나치게 간섭하는 해리 보슈와, 비록 이혼했지만 다시 점수 좀 따보려는 아내와의 줄다리기 등등 서브 스토리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느낌이다. 좋게 보면 상다리 휠만큼 먹을게 많은 거고, 나쁘게 보면 메인 요리가 부실한 거다. 후속편을 생각해서 여기저기 밑밥을 뿌리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는 안되지. 이런 구멍을 강렬한 캐릭터로 메꾼다면 모를까, 순둥이가 되어버린 할러에게는 더 이상 배꼽을 커버칠 힘이 없었다. 어째서 작가는 그렇게나 개성 가득했던 캐릭터를 겨우 두 편만에 탈바꿈한 것일까.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을 테지만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제프리 디버가 떠오른다. 둘 다 미국을 대표하는 하드보일드 스릴러소설 작가이고, 시리즈 작품을 쓰면서 매번 대박을 터뜨리는 것도 똑같고, 범죄 분야의 전문성과 문학의 대중성까지 갖췄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디버의 글이 김경호라면 코넬리의 글은 박완규이다. 디버는 김경호처럼 날카롭고 스트레이트한 음색이고, 코넬리는 박완규처럼 묵직하고 와일드한 음색이다. 여러 면에서 닮아있는 둘이지만 차갑고 강렬한 디버의 글은 겨울 왕국을 연상케 하고, 코넬리의 글은 어둡고 후덥지근한 분위기라서 지하 던전을 연상케 한다. 이상하게도 그 던전에 한번 들어가면 숨쉬기가 힘든데도 나오고 싶지가 않다. 느낌 아시죠?


원래 법정 스릴러 하면 존 그리샴이지만 워낙 벽돌 책이라 읽어볼 엄두가 안 났는데, 코넬리 표 법정물은 두꺼워도 별 부담이 없어서 좋다. 장르 특성상 법정물은 진지하고 딱딱한 분위기의 연속이어서 일정한 재미를 주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어떤 분야보다도 훨씬 높은 전문성을 요한다. 그 어려운 걸 코넬리는 보란 듯이 해내고 있는데 1편도 그렇고 이번 편도 매우 준수한 내공을 보여준다. 흔한 변호인의 속고 속이는 이야기만으로 재미를 뽑아내는 게 한계가 있으므로, 기자나 형사들과도 엮어 의뢰 사건의 안팎으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일명 텐션 뻥튀기라고 하는데 코넬리가 이걸 참 잘한다. 타고난 감각과 고유의 컬러를 정말 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코넬리 작품은 무조건 읽어주자. 칭찬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패스파인더 2020-06-03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넬리의 해리보쉬 시리즈도 볼만합니다. 미키할러 변호사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정통수사물
느낌이 많이 나요.

물감 2020-06-03 09:49   좋아요 0 | URL
아 보슈 시리즈는 몇권읽었어요! 제 취향은 해리보슈가 더 좋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