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걸 읽어야 하나 오랫동안 망설였던 책이다. 장르소설 매니아층에서는 필독서로 알려져 있는 듯한데, 어쩐지 그럴수록 더 손이 안가더랬다. 우연히도 회사 도서관에 고이 잠들어있길래 함 가져와봤는데 세상에 이리 재밌는 걸 왜 이제야 읽게 된 것인지 참으로 한심하도다, 나님이여. 노래도 옛것이 좋았듯이, 소설도 그렇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시겠다.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독일문학이라니? 이 정도 수준이면 삐뚤어진 내 선입견도 고쳐볼 만하겠는데. 역시 거장은 레벨이 다르다 이겁니까. 분위기나 문체는 ‘주제 사라마구‘와 비슷하고, 비유와 표현력은 ‘토머스 쿡‘의 느낌이며, 재미와 속도감은 ‘장용민‘을 닮아있다. 사기캐를 발견했으니 저자의 다른 책들도 섭렵해봐야겠다. 벌써 기분 좋고 난리다.


어려서부터 후각에 천부적 재능을 가졌으나 정작 제 몸엔 아무 냄새가 없어 늘 기피 대상이었던 주인공. 고아 출신의 소년은 훗날 향수 제조인의 길을 걸으며 무형의 재능을 유형으로 바꾸어 세상을 놀래킨다. 반면 냄새의 수집을 위해 충동적으로 살인을 한 그의 내면에는 엄청난 악마가 깨어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궁극의 향수 제조와 냄새 수집을 위해 세상을 떠돌며 인간 사냥을 시작한다. 점차 세상을 공포로 몰아가는 이 애정결핍 히키코모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이 작품은 관점에 따라 냄새에 환장한 변태의 유치뽕짝 이야기일 수도 있고, 전례 없었던 고전과 스릴러를 혼합한 퓨전 판타지 장르일 수도 있다. 일단 만물의 냄새를 맡는다는 설정부터가 비현실적이라 취향 면에서 갈릴만 하다. 그래서 주인공을 선이 아닌 악으로 세워서 살인자의 이야기를 쓴듯싶다. 후각이라는 소재로 뭘 얼마나 보여줄지 기대는 안 했는데 이거 원 예측불가한 참신함의 연속이었다. 보통 악역 시점의 작품들이 심리 쪽도 같이 다루는데 비해 이 책은 감정이 결여된 캐릭터라 심리 장면이 전혀 없다. 그래서 더더욱 앞을 예상하지 못한다. 근데 이렇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플롯도 은근한 매력이 있었다. 


그는 후각으로 세상을 배워나갔다. 사물의 존재를 냄새로 인식한 다음 머리에 입력하였다. 그렇게 점차 모든 냄새를 수집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의 광기는 깊어져만 갔다. 일생을 혐오 속에서 살아왔지만 그의 광기는 타인의 멸시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첫째는 향에 대한 갈망으로 빚어진 순수함이 악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래서 살인을 했어도 그게 죄인지 몰랐고, 향수로 타인을 속이거나 조종하는 행위도 무엇이 잘못인지를 몰랐다. 둘째는 자신의 무(無) 존재에 대한 수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이 두려워 7년의 동굴 생활을 떠나 마을을 찾아가고, 인체 향수를 만들어 자신의 무체취를 감추는 등 인간적인 모습도 여러 번 보여준다. 반면 향수 제조를 위한 계획을 실천하는 치밀함도 보여주며 독자를 계속 들었다 놓는다.


냄새에 마음을 뺏겨 살인에 손을 댄 주인공은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였다. 죄악의 눈이 열린 이상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향기에 미칠 대로 미친 그는 결국 연쇄살인을 저지르며 인간의 냄새를 수집한다. 과거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살인이 나비효과가 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순수한 욕망일 뿐이어서 허무하게 붙잡혀버린다. 이쯤부터 점점 텐션이 떨어져 이 책도 용두사미인가 했는데 또 한번 판을 뒤집어놓는다. 이 살인자는 궁극의 향수로 모든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죄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무력을 쓰지 않고도 세상을 정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자신은 사랑이 아닌 증오 속에서 만족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모든 계획을 성취했는데 이젠 뭘 할까 싶던 차에, 작가는 기발한 방법으로 주인공의 운명을 던져주고 깔끔하게 마무리하였다. 살인자의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 기분 참 이상하네.


휴대폰만 보고 있는 사람은 머리 위의 만발한 벚꽃을 보지 못한다. 이 책의 살인자도 그런 케이스이다. 냄새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 외엔 아무것도 보질 못하고 있다. 그게 어째서 안타까웠냐면 어렸을 땐 나름 감정이란 게 있기는 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거나 기쁘게 해줄 줄도 알았다. 허나 아무도 케어해주지 않았으니 올바른 길이 어딘지 누가 알랴. 그 결과 악의가 전혀 없는 그의 행동은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살인자가 요즘 핫이슈인 N번방 사건의 조 모씨와 여러모로 캐릭터 겹치는 듯. 이런 악마는 소설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즐거운 독서였고,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쥐스킨트 작품 추천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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