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리 빈테르의 아주 멋진 불행
얀네 S. 드랑스홀트 지음, 손화수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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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로 냄새가 진동하는 제목만 보고 또 다른 글로벌 병맛 작가의 등장인가 싶어 냉큼 집어 들었다. 연속으로 하드한 책만 읽어서 확 달궈진 전두엽을 식혀주기에 딱 좋아 보였다. 요즘은 음식도 단짠단짠이 디폴트 아닙니까. 암튼 내가 이 책에 흥미를 가진 건 노르웨이 문학에서 유머와 위트를 다룬다는 의외성 때문이었다. 노르웨이의 문학 컬러가 비비드한 딥 블랙이라고 어디서 들은 건 있었거든. 뭐가 되었건 제목만으로도 한 명 낚았으니 마케팅 성공한 거지 머. 나는 이렇게 문학으로 웃음 주는 작가들을 진정으로 존경한다. 요즘처럼 웃을 일 없는 시대에 작게나마 피식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런 건 언제든지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바이다. 그럼 이제 주인공께서 어디 얼마나 불행하신지 함 진찰해드립죠.


대학교수인 주인공은 곧 정리 해고되기 직전이다. 또한 경매로 비싼 집을 더 비싸게 구하고, 현재 집은 안 팔려서 죽을 맛이다. 직장에서는 무능한 직원으로, 집에서는 미련한 아내로 낙인찍혀버린 그녀. 가뜩이나 심각한데 해고를 반대하고자 하극상을 꾸몄다는 누명까지 쓴다. 결국 학과장은 주인공을 자매결연 사절단으로 러시아에 보내버린다. 이후 나사 빠진 파트너들 덕분에 국제 범죄자가 되어 뉴스 헤드라인을 찍게 생긴 빈테르 여사. 대체 불행의 여신께서는 언제쯤 그녀를 떠나시렵니까...


흠. 이것이 노르웨이가 보여줄 수 있는 유머의 한계구나. 나는 요나스 요나손처럼 심각한 상황을 연출하고 능구렁이처럼 사태를 넘어가면서 나오는 유머를 기대했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고 그저 사태의 심각함을 가볍게만 다루고 있다. 이건 뭐 어설픈 블랙 코미디만도 못한데 노르웨이에서는 걸작의 탄생이라며 바다 건너 한국까지 왔다는 게 사실입니까.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웃픈 상황의 연속인데, 이런 해프닝을 작정하고 썼다는 사실이 더 웃프시다. 근데 진짜 제목대로 개인의 불행한 이야기가 전부였다니. 제목으로 기대감 잔뜩 올려놓은 거에 비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트콤 같은 코믹 장르도 아니고, 주인공의 성장 드라마도 아니고, 기승전결도 엉망이고 거참 작품의 성격을 모르겠음. 번데기가 되다 만 애벌레 같은 모습이랄까.


어김없이 이번에도 주인공을 신랄하게 까 보겠다. 하기 싫은 컨퍼런스 준비를 최대한 미루고, 툭하면 연구실 문밖에 ‘시험 중‘ 팻말을 걸어놓고 딴짓하며,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거짓말과 변명을 늘어놓는 등 전형적인 뺀질이 캐릭터인데 정작 자신은 품위 있는 컨셉을 유지하고 있다. 어쩐지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구상하신 듯한데, 글쎄요. 아무리 봐도 사랑스러운 구석이 없는걸요? 한국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거 같아서 큰일이네. 암튼 직장 문제, 부동산 문제는 충분히 불행하다 볼 수 있지만, 워낙 분위기를 라이트 하게 깔고 있어, 누구나 겪는 고생 가지고 너무 오버한다 싶더군. 미안하지만 한국에선 매우 흔한 일상이라서요. 나름 빵 터뜨리려는 작가의 노력이 곳곳에 보였지만 컨텐츠부터 이미 실패였음. 당신의 웃음 코드는 애석하게도 전혀 와닿지 않았다요. 겨우 이 정도로 배꼽 잡다니, 노르웨이 국민들은 정말 순수한가 봐.


잠깐 옆길로 샜는데 다시 주인공을 까 보자면, 캐릭터 설정 자체가 큰 모순이었다. 원래부터 그녀가 어리바리하고 미숙하고 칠칠치 못한 게 아니었다. 뭔가를 계획할 때면 별별 상상을 다 하고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둘 줄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멀쩡한 주인공이 왜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사고 회로가 멈추고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집을 경매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집안 재정을 계산할 정도로 정신머리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뭔가에 홀린 듯이 금액을 올리고 낙찰에 목숨을 건다는 게 말이 돼? 전혀 단가가 맞지 않는 설정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스스로도 선을 넘으면 불행할 것을 잘 안다는 사실. 이건 뭐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요, 매력도 없는 캐릭터에 설정 붕괴까지? 이 분도 헛개수 드링킹이 좀 필요해 보임. 의식의 흐름대로 가는 것도 정도껏 하셔야 욕먹지 않습니다요.


주인공이 다양한 불행을 겪는 동안 변화할 기회나 계기가 많았음에도 어중간한 컨셉 때문인지 달라질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본인이 문제가 생길만한 곳에 항상 발을 담그려 하는 경향이 있단 걸 스스로도 알고 있단 게 유일한 킬링 포인트라 하겠다. 물론 상황들이 그녀에게 워낙 비협조적이지만 자신이 리드해나가는 게 하나도 없고 계속 끌려다니고만 있어, 애교로 봐주던 독자들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라. 이런 언밸런스를 보고 난 다음부턴 아무런 기대감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어서 차라리 속 편하고 좋았음. 그래, 이럴 때 낙관적인 독서 습관도 좀 길러보지 뭐. 적어도 한국인을 흡족시키려면 한참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드랑스홀트 쓰앵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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