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 소실형 레드 문 클럽 Red Moon Club
가지오 신지 지음, 안소현 옮김 / 살림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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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한지 오래된 작가인데 국내에는 한두 권밖에 안 나온 것이 이상하다. 옛날 분이라 그런지 요즘 일본 작가들과 달리 필력도 좋고 무게감도 있다. 진짜 이 정도만 되어도 내가 일본 문학을 열렬히 사랑해줄 텐데. 이번에도 제목에 끌려서 고른 건데, 생각해보면 제목이 좋았던 책들은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당분간은 제목 위주로만 검색을 해볼까나. 일단 소재도 신선하고 리얼리티도 꽤 좋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그 좋은 소재를 잘 살렸다는 느낌은 없었고, 다 괜찮았는데 역시나 마무리가 부족하다. 길이 막힌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싶은 결말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읽은 사회파 소설이라 배운 게 많은 책이니 그걸로 만족하련다.


일본의 모든 교도소는 더 이상 죄수를 수용할 수 없을 만큼 꽉 차있다. 그래서 나온 대체 방법이 형기를 줄여주는 ‘소실형‘이다. 1년 징역형이던 주인공이 택한 이 소실형은 징역형과 달리 몸은 자유로운 대신 목에 배니싱 링을 달고 지내야 한다. 이 특수한 링은 주변 사람들의 뇌에 전파를 보내어 링 착용자를 못 보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려고 하면 목을 콱 조여버린다. 그래서 전화도 채팅도 편지도 금지되고, 인간과 접촉도 안되고, 거주 지역도 벗어나면 안 된다. 이미 집에는 TV, 컴퓨터, 라디오 등등 의사 전달이 가능한 수단은 전부 치워져있다. 그냥 조용히 썩다가 형기가 다 되면 링이 자동 해제가 되는 시범 제도인데, 이걸 버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여차여차해서 형기는 끝났지만 링이 고장 나서 해제되지 않는 비상사태가 되어 교도소를 찾아갔으나 건물이 통째로 사라졌다. 링은 계속 작동되는데 도와줄 사람도, 요청할 방법도 없다. 우려하던 공포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이 불쌍한 영혼에게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몇 %나 될까.


솔직히 처음에는 컴퓨터만 있으면 할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PC, TV를 다 뺏어가고 시간 때울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이건 뭐 대략 난감이다. 뭐 어쩌겠는가. 주인공은 그냥 밥 먹고 똥 싸는 기계처럼 8개월을 보냈어야 했다. 그랬으면 조용히 자유의 신분을 만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 책은 전혀 재미가 없었겠지. 소실형은 세상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형벌이었다. 먹고 자고 숨 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죽은 사람처럼 지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인간이 살면서 당연하게 하던 것들이 제한될 때 그동안 얼마나 복에 겨웠는지를 알게 해준다. 어디든지 내 맘대로 돌아다니고, 모르는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고, 메신저나 SNS로 간단한 소통도 하고, 먹고 싶으면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이런 일상들. 사는 게 지쳐서 차라리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단순히 투명인간이 된 자신을 한탄하는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소실형을 선고받은 후로는 인적 없는 거리만 돌다 보니 노숙자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 노숙자들을 보고 느낀 감상이 크게 와닿았다. 노숙자는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고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노숙자나 소실형 죄수나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북적거리는 도심 속에서 고독함에 빠져 미쳐버리다가 자살을 택할 수도 있다. 소실형이 되고 나서 주인공이 가장 갈망하고 갈급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는 말처럼, 은따보다 차라리 왕따가 낫다는 말처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은 말로 설명 못 할 무서운 일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길가에 자라난 들풀하고 뭐가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면 소실형이 얼마나 무서운 벌인지 실감할 수 있다.


나는 처음부터 배니싱 링이 형기가 끝나고도 해방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소실형을 택한 자의 말로는 결코 좋게 끝나지 않을 거란건 안 봐도 비디오였다. 딱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야기 아닌가. 먹음직해 보이던 선악과를 택하고 자유를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엄중한 형벌. 정말로 주인공은 형량이 끝나면 자유가 될 거라고 믿었단 말인가? 링이 자동으로 풀린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단 한 번도 그 제도에 의심을 안 할 수가 있지? 나라면 절대 소실형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에서는 시스템 오류인지 고장인지 형기가 끝났는데도 링이 해제되지 않은 걸로 나왔지만, 이 불완전한 시스템을 절대 믿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범죄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일까? 보통 일반인 입장에서는 죄인에게 내려진 형벌보다 더 심한 처벌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대다수인데 말이지. 이것도 참 아이러니하네.


이 답도 없는 이야기의 결말을 어떻게 장식할 건지 궁금했는데, 투명인간 주인공에게 누군가가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 목소리를 찾아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면서 자신의 정체도 밝힌다. 자신이 직접 나서면 링이 방해하기 때문에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 수단이 향수였던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향수만으로 주인공이 지나간 길을 경찰들이 잘 맡고 따라간다는 게 무리수였다. 후각이 거의 훈련견 수준이시던데 그냥. 여튼 스토리가 아쉬워도 뼈 있는 교훈이 가득한 이런 작품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역시 짬밥은 무시할 수 없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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