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기 톰의 집에 어서 오세요 판타스틱 픽션 그레이 Gray 5
벤 엘튼 지음, 박슬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여러명의 용의자를 다루는 작품을 공부하기 위해 집어 든 책이다.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그동안 인물이 많았던 작품은 캐릭터만 신경 써서 스토리가 빈약해지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한 경우가 많았다. 그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고 싶었는데, 이 작품은 전혀 다른 추리 패턴이라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선해서 좋았다. 역시 RHK는 평타 이상 치는 소설이 많다. 이 책은 제목처럼 엿보는 기분으로 읽는 맛이 있다. 문틈 사이로 몰래 훔쳐보는 재미까지는 아니고 CCTV 모니터를 보는 기분 정도는 들 것이다.


리얼리티 동거 프로그램에 남녀 10명이 참가한다. 총 9주 동안의 합숙 생활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한 명이 우승 상금을 가져간다. 매주 TV 방송을 통하여 시청자에 의해 탈락자가 한 명씩 지정된다. 참가자들이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모습을 보여줄수록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그러나 이 폐쇄된 공간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이 정신 나간 쇼에 완전히 미쳐있다. 그 때문에 방송은 멈춤 없이 계속 진행되고 열기는 점점 달아오른다. 반면 집안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피해 교묘하게 살해한 살인범을 찾아내기 위해 경찰들은 촬영된 모든 영상 파일을 모니터링한다. 과연 범인은 누구며 범행 방법과 살인 동기는 무엇인가. 정년퇴직을 앞둔 담당 경찰은 그동안의 짬을 다 토해내서라도 이 수수께끼를 풀어내야만 한다. 이건 뭐, 말년에 유격 훈련하는 꼴이다... 어휴.


동거를 시작한 지 2주 밖에 안됐는데 살인 사건이라니, 어딘가 말이 안 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그 짧은 기간 안에 살인할 정도로 증오가 생겨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작가는 참가자들이 피해자에게 악감정을 갖도록 설계했다. 그렇게 참가자 모두가 용의선상에 오르도록 만들었고, 전부 의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런 이유로 살인 감정을 갖는다는 게 말이 되냐‘ 싶은 사람도 몇몇 있었는데 나중에 각자의 속 사정이 자세하게 나와서 억지스럽던 흐름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보통 용의자가 많은 추리물에서는 각자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고, 진실의 유무를 가려내고, 살인 동기를 찾는 게 순서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미 알리바이도 동기도 다 드러나 있어서 어떻게 추리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대체 어떤 방향으로 갈지 짐작조차 안되는 구성은 훌륭했으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경찰들의 모니터링 내용은 초반부터 지루했다. 스튜핏.


제작진은 모든 용의자들이 어느 정도는 각본대로 움직여지고 있다고 경찰에게 말했다. 그니까 아무리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찍는 리얼리티라 해도 약간은 짜고 치는 건 맞는다는 말이다. 티 안 나게 일명 악마의 편집으로 방송에 내보냈을 뿐. 그렇다면 편집되지 않은 촬영 원본 파일에는 살인에 대한 단서가 담겨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런 게 없었다. 작가는 이렇게 허점이 없는 상황을 계속 연출함으로써 독자들을 속인다. 알다시피 방송이란 다 짜고 치는 것인데, 다 읽고 나니 방송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독자는 읽는 내내 자기가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됬을 때 반응은 둘 중 하나다. 화가 나던가, 감탄이 나오던가. 아무튼 벤 엘튼의 쇼는 책 안에서나 책 밖에서나 계속되어야 한다.


돈에 미친 제작진 대표는 살인사건 이후로도 어떻게든 남은 참가자들을 동거하도록 설득했고, 이를 비난하는 언론과도 1대 100으로 싸웠다. 그만큼 제작진 대표는 확신에 찬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전 세계에서 이 쇼가 계속 진행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길고 길었던 합숙이 끝나는 날에 최종 우승자가 발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프로그램은 나름 괜찮은 성공 기록을 거두었다. 그때 전 세계 촬영기자들이 모인 그 자리에서 담당 형사가 살인범을 공개 지목한다. 이로써 전무후무한 지상 최대의 쇼는 막을 내렸지만, 생각만큼 빅 스케일까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왜 사건 담당을 하필 은퇴 직전의 노장 형사로 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는데 끝에 가서야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스케일이 큰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개 하드웨어만 신경 쓰고 소프트웨어는 부실하기 때문인데, 이 작품 정도면 그래도 밸런스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이 든다. 다 떠나서 누구나 속을 수밖에 없는 플롯을 만든 것 자체에 기립박수를 보낸다. 짜라 짜라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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