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것에 대한 분노
베키 매스터먼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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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제목에 끌려서 읽었다. 요즘 책들은 진짜 제목을 너무 잘 짓는다. 오랜만에 묵직한 스릴러 책을 발견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읽는 책들보다 분량이 적은데도 진도가 느려서 힘들었다. 은퇴한 FBI 59세 원더우먼의 네버엔딩 수퍼액션과 수다액션의 중간쯤 되는 작품인데, 이 정도 데뷔작이라면 아주아주 훌륭하다.


은퇴한 FBI 할머니에게 옛 동료가 찾아왔다. 66번 고속도로 살인사건의 연쇄살인범이 잡혔단다. 그 사건은 주인공의 현역 시절에 가장 큰 살인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후임이 납치 및 실종이 된 채 미제로 남은 불명예스러운 사건이었다. 붙잡힌 범인은 모든 시체의 장소를 알고 있었고, FBI만이 알고 있는 정보들도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범인이 확실한데, 어째선지 주인공만 이 범인이 미덥지가 않다. 하여 뒷단에서 몰래 무허가 수사를 하는 주인공에게 갑자기 총알이 날아든다.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파트너인 담당요원이 갑자기 사건에서 빠진 뒤로 계속 연락 두절이 되는데 FBI는 규칙을 어기고 단독 행동을 했다며 나 몰라라 한다. 주인공은 담당요원의 행방불명이 과거 자신 때문에 실종된 후임과 오버랩되어, 진짜 범인을 밝혀내기로 한다.


뭔가 이상했다. 액션씬에도 흥분되지 않고, 심리전에서도 전혀 조마조마하지 않았다. 분명 설명도 디테일하고 필력도 좋은데 분위기는 쭉 무덤덤했다. 그러다 주인공이 한 남자와 치고받고 싸우다가 죽여버린 시점부터는 순식간에 고급 서스펜스 스릴러로 바뀐다. 정말이지 이 책도 전반전과 후반전의 온도차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저자가 기존의 액션/스릴러 작가와는 다르다고 느낀 게 상황을 마구 꼬아놓고 비틀어서 주인공을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시련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주목할만한 장면이 꽤 많았는데, 특히 한순간의 판단 미스로 살인자가 돼버린 은퇴한 FBI의 심정이 대표적이다. 용의자를 죽인 멘붕으로 인해 온전했던 정신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실수도 연발하는 인간미를 보여준다. 동료들은 붙잡힌 가짜 범인만 보느라 진범의 유무는 생각조차 없어서, 이대로 자수해버리면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린다. 우리의 실버스타는 애초에 수사권한이 없는 상태였었고, 그 협조 자격마저 박탈당했으나 자신을 위협하는 자들 때문에 이 수사에서 손을 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심정이 첫 번째 관전 포인트다.


두 번째 포인트는 주인공 본인이 살인자라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의심받는 입장이 되니 주인공이 하는 모든 주장에 신빙성이 떨어지고,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는 가운데 고통만 더해진다. 근데 난 사실 좀 의아했다. 동료들이 주인공과 1~2년 일해본 것도 아닌데, 왜 다들 주인공이 하는 말들을 흘려듣는 걸까. 여하튼 살인사건을 숨기고 진범을 찾는데 이 과정에서 몰려드는 양심의 가책과, 남편에게 숨겨온 진짜 신분이 들통나서 사이가 틀어진 자괴감 때문에 멘탈이 계속 흔들린다는 설정이 퍼펙트했다. 그리고 살인을 숨기고 연기하는 자신이 살인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여기는 것도 참 볼 만 했다. 자신의 부자연스러움을 의심하는 옛 동료에게 고백할까 말까, 끝없이 망설이는 양심과의 싸움이 작품의 액기스라 하겠다.


세 번째 포인트는 적으로부터의 위협과 동료들에게 위협을 동시에 받아야 하는 진짜 뭣 같은 상황에서 행동파인 주인공이 두뇌파로 변해가는 장면이다. 아 물론 행동파라고 해서 아이큐 낮은 멍청이는 당연히 아니지만 그래도 두뇌 플레이라는 말이 있잖아? 재밌는 건 행동파들의 두뇌 플레이는 탐정이나 프로파일러와는 다르게 직감과 본능으로 이루어진 다는 점이다. 예측불가한 그것이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가 아닐까 한다. 내가 너만큼은 잡고 죽겠다는 주인공의 완고한 집념! 우리는 흔히 이것을 간지 폭풍이라고 한다. 사실 비밀을 알아낸 주인공이 쫓기는 신세가 되는 작품은 얼마든지 널려있다. 그래서 매력적인 플롯은 아니지만 이 은퇴한 실버스타께서 보여주는 플레이가 모든 걸 커버한다. 다시는 노장을 무시하지 마라,는 눈빛도 쏴주면서 말이다. 이런 게 잘 빠진 캐릭터가 부실한 작품을 살리는 케이스이다. 이처럼 스토리가 부실해도 캐릭터만 잘 잡으면 무난하게 흘러간다.


야쿠마루 가쿠의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예를 들면 과거에 쌩양아치였으나 지금은 갱생한 주인공을 응원하기도 뭐하고 안 하기도 거시기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그러나 독자는 일단 응원하고 본다. 어쨌건 주인공이니까. 이 작품도 비슷하다. 아무리 악인이고 정당방위여도 FBI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범죄이다. 게다가 사실을 묵인하고 범죄현장에 손을 댄 것 또한 중범죄이다. 그런데도 독자는 주인공의 생각과 판단과 행동을 내 일인 양 받아들이면서 읽게 된다. 왜냐? 주인공이 보여주는 엄청난 집념 때문이다. 이렇게 불타는 정의감은 독자들이 저절로 응원하게끔 만든다. 진짜 캐릭터 하나는 잘 뽑았다. 한 번만 쓰고 버리긴 아까운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시리즈물이었다.


죽어가는 것에게 느끼는 분노가 대체 뭘까. 절반의 분량이 넘어가도 제목이 이해되지 않았다. 주인공의 분노는 헐크마냥 세상만사에 뻗치고 있었고, 피해자들은 이미 죽은 마당에 죽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더라. 그러다가 퍼뜩 깨달았다. 중요한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를. 이 분노는 크게 세 번 나온다. 먼저는 가짜 진범이 총을 맞고 죽어가는데 그에게서 캐내지 못한 진실 때문에 느끼는 분노이다. 다른 하나는 죽은 후임의 아버지가 자살하는 모습을 보며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이다. 마지막으로 담당요원이 범인의 옆에서 죽어가는데 도와주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것에 대한 분노이다. 자신의 힘으로 통제가 되지 않아 절망하게 되는 모든 상황들이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였다. 그냥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다 좋았는데 진짜 범인의 정체는 다소 황당했다. 작가가 나름의 복선을 깔아두었지만 내가 받은 인상은, ‘겨우 그게?‘였다. 등장하는 장면도 짧은 데다 떡밥도 뒤늦게 나왔던 터라 어이없었지만, 이것도 잘 만든 주인공 덕분에 애교로 봐드렸다. 범인이 왜 살인자가 되었는지, 왜 범죄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 있으면 더 입체적이고 좋았을 텐데, 그런 게 없어서 아쉽다. 주인공한테만 매력을 몰빵하느라 악역에 신경을 못 쓴 건지 진짜 멋없는 캐릭터가 돼버렸다. 너무 주인공만 편애하는 것 아니오, 작가 양반? 이런 건 아니 되오. 스릴러 장르는 악역이 주인공만큼이나 중요합니다요. 늘 그렇듯이 1편은 다 용서해드리지만 다음부터는 악역에도 좀 신경 써주시길 바라바라바라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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